火刑(화형)을 當(당)한 聖女(성녀) 잔 다르끄 佛蘭西(불란서)를 救(구)했다
발행일1960-10-09 [제249호, 4면]
<쀼셀러 도레앙> 즉 <오레앙>의 동정녀라고 불리우는 <쟌 다르끄>는 1412년에 「로렌」지방에 있는 「동레미」에서 난 「프랑스」(佛蘭西)의 한 여(女) 영웅이다.
그는 어느 가난하고 신심깊은 가정에 태어나서 선대(先代)로부터 물려받은 생업(生業)인 사목(飼牧)과 기구를 일과로 삼고 있었다.
양떼를 치던 어린 <쟌>이 처음으로 성녀 <말가리다>와 성녀 <가다리나>를 거르니고 나타나신 성 <미가엘> 대천의 발현(發現)을 본 것은 겨우 열세살 되던 때이었다.
그는 7년동안 그 대천신과 성녀들로부터 설유(說游)를 받아왔으며 마침내 믿어지지 않는 그의 모험을 실천하기로 마음먹고 권하는대로 복종하였던 것이다. 성 <미가엘> 대천신은 <쟌>에게 말씀하시기를 『천주의 딸이여 너의 마을을 떠나 군기(軍旗)를 들어라! 마음껏 높이 치켜들어라! 대관식(戴冠式)을 올리기 위하여 왕자(王子)를 <랭스>의 <따떼드란>(寺院)로 안내하라! 너는 영국 군대의 침략으로부터 「프랑스」를 구(救)하리라~』고 하셨다. (註 프랑스에서는 시왕(始王)으로부터 역대(歷代) 왕이 <랭스>에 있는 주교좌성당에서 대관식을 올림으로써 정통인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당시에 장차 <샬> 7세왕이 될 <도펭> 왕자는 영국군대의 정령지대인 <랭스>로 갈 수 없어 대관식을 올리지 못하고 있었다.)
이 모험은 역사적 사실이기는 하나 참으로 이상하지 않습니까? 이 모든 이야기는 일상생활 속에서 일어나는 초자연성(超自然性)의 발현으로 역사가를 당혹(當惑)케 하고 있다.
그것은 영국의 침략으로부터 「프랑스」를 구하기 위한 것이었다. 거느 나라를 구하기 위하여 천주께서 직접 간섭을 하신 일은 세계 역사상 예가 없는 일이다.
<쟌>은 먼저 「프랑스」의 왕자(戴冠前인 王)를 뵙기 위하여 <시농>으로 갔다.
그러나 왕자는 <쟌>의 사명을 믿기 어려워 많은 궁인(宮人)들 사이에 숨어 버렸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한번도 왕자를 본 일이 없는 그가 조곰도 서슴치 않고 바로 피하여 있는 왕자 앞으로 찾아나아갔다. 마침내 그의 위대한 역할로 왕을 설복시켰드며 얼마 아니되었다. 그후 <쟌>은 그의 유일(唯一)한 무기인 군기(軍旗)만을 들고 둘러싼 노병(老兵)들로부터 그 덕망보다도 한 위대한 무인(武人)으로서의 존경을 더욱 받으며 영국군을 추격하여 적에게 함락(陷落)되었던 도시(都市)를 하나 하나 되찾으며 왕이 축성(戴冠)을 받게 하기 위하여 <랭스>로 갔다.
이로써 <쟌>의 본사명은 성취(成就)되었다.
그는 대중(大衆) 앞에서 그들의 자유를 지킬 권리를 선포(宣布)하였다.
그후 <쟌>은 <빠리>로 향하려 했으나 왕의 명령으로 그의 계획을 단념할 수 밖에 없게 되었으며 아마 자기 편으로부터의 부상(負傷)과 버림과 배신(背信)을 받아 <쟌>은 <부르기뇽> 사람들의 손으로 넘어가 영국군에 팔리고 말았다.
영국인들은 그를 마법사(魔法師)라고 고바라여 <보베>이 주교 <삐에르 꼬숑>을 재판장으로 하는 종교재판에 회부(회附)하였다.
그 당시 <쟌>은 겨우 19세였다. 놀랄만큼 영리하고 단순한 그는 천주께서 그를 시켜 일하신 것이며 초자연의 힘이 그를 인도한 것임을 밝혀 바르고 충분한 답변으로 신학자들에게 항거하였다. 그랬으나 드디어 이교도(異敎徒)라는 선고(宣告)를 받아 1431년 5월 30일에 <루앵>에서 화형(火刑)을 받아 죽고말았다.
그가 죽은지 25년후인 1456년에 그는 다시 명예회복(名譽回復)을 받았으며 1909년에는 교회가 그를 복자품에 올렸고 1920년에는 성녀품에 올렸으며 지금은 「프랑스」의 주보(主保)로 뫼시어지고 있다.
이상과 같은 성녀 <쟌 다르끄>의 약사(略史)를 훑어본 우리들은 이제 한걸음 더나아가서 정확하고 신중하게 이 사실을 생각해 봐야 하겠다. 결과적으로 볼 때에 교회가 그를 성녀로 서성(叙聖)하였다면 5세기 전에 그를 불에 태워죽인데 대하여 교회가 또한 규탄(糾彈)을 받아야 할 것이 아닌가.
그 재판을 한 것은 <보베> 주교였다. 그는 영국인으로부터 호감(好感)을 사기 위하여 <쟌>을 처형하였다. <쟌>은 죽기전에 『주교님, 저가 죽는 것은 당신때문입니다』라고 말했다.
우리는 어떻게 이 일을 알아들어야 하겠읍니까?
확실히 <쟌 드르끄>의 재판은 종교재판이 속권(俗權)하여 있었던가의 증거가 된다.
그 재판은 오로지 영국왕 <헨리> 6세의 명령에 의하여 열린 거짓종교재판이었으며 왕이 마음대로 선택한 관할권(管轄權)도 권한도 없는 재판관에 의하여 재판되었던 것이며 법의 본질적 규정을 침범했고 불리(不利)한 증거물을 은익하고 거짓법전을 인용한 재판이었다.
그뿐 아니라 그 사건이 성청(聖廳)의 재판소로 이심(移審)될까 두려워 성청 몰래한 재판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실(實)은 <쟌>은 한번도 죄의 선고를 받은 일이 없는 셈이다.
사람들이 교회가 「프랑스」의 여(女) 영웅을 죽였다고 규탄할 때에는 실은 <쟌>이 종교재판이라는 탈을 쓰고 복수(復讐)하는 영국인에 의하여 처형된 것임을 밝혀 시정(是正)해주어야 한다. 또한 서슴치 않고 영국인에게 봉사하고 그들로부터 호감(好感)을 사기 위하여 부정한 재판에 협력한 주교가 있었다는 것을 유감스럽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결국 교회는 <쟌>의 명예를 회복시켰으며 『그 소송(訴訟)과 판결은 사기(詐欺)와 중상(重傷)과 부정과 법률상 및 사실상의 드러난 과오로 인하여 결과적으로 무효이며 아무런 가치도 권위도 없는 것이다』라고 선포한 사실을 기억하여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