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니라=존 마아레어 신부 記】 「비율빈」 당국은 수도 「마니라」에서 불과 1백「마일」 밖에서 무장한 공산주의자들의 활동이 재현되리라는 증조에 대하여 심대한 관심을 표명하고 있다.
무분별한 살육(殺戮)이 「후크」단의 본거지인 「틸락」과 「팜판가」의 중부 「투손」에서 일어나고 있다.
「비율빈」의 군당국은 이러한 사태를 공산당활동이 「의회투쟁」으로부터 무장 폭동에 의한 투쟁으로 전향하는 증조라고 관망하고 있다.
지난번에 일어난 살인의 희생자들은 그 지방 지주(地主)와 공산돨동으로부터 이탈한 전 「후크」단원들이었다.
「후크」단은 세계 제2차 대전시 「비율빈」의 일본군 정복기간을 통하여 일본에게 대항하여 군사적 활동을 했던 공산주의자 지도하의 「게리라」부대 였으며 대전이 끝난 후 「후크」단은 「비율빈」정부에 대항하는 「게리라」활동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1951년에는 그들의 세력이 지극히 위험한 상태까지 방대하여저 「마니라」 근교까지 거의 세력권 내에 잡아 넣었으나 당시 국방상이 었던 노련하고 박력있는 고 <막사이사이> 대통령에 의해서 「후크」의 사기는 완전히 분쇄되고 극도로 그들 세력을 약화시켰다.
이렇게 된 후에 공산주의자들은 이제는 「비율빈」 내에서 무장 활동의 생각조차 못할 것으로 간주하여 왔고 「법율과 의회투쟁」에만 모든 수단과 방법을 집중시켜 왔었던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수천명이 중부 「루손」의 주민들은 「후크」단이 다시 활동을 개시할 것을 결의한 후 8월 한당에 걸쳐 전반에 걸친 파멸적인 유혈로 인하여 참담한 고통과 살육을 당하고 있다.
소리없이 민첩하게 타격을 가하는 그들은 공산준동에 대하여 아직도 적개심을 품고 있는 사람들을 일소해 버린다고 위협함으로써 주민들을 점점 공포와 불안의 도가니 속에 몰아넣고 있다.
이와같은 무장습격을 일삼는 「후크」단의 정확한 숫자는 아직 알려지지 않고 있다. 정부의 정보부 보고에 의하면 많은 전 「후크」단원들은 각자 집에서 이미 자취를 감추었으나 의견이 일치된 포도적 활동만 일어나면 곧 다시 야합(野合)하고 있는 것이 거의 확실하다 한다.
현재 약 2천명의 「비율빈」 경찰군은 지방에서 「테로」공포정치를 감행하고 있는 「난동부대」를 생포하기 위하여 「팜판가」지역의 「아라야」산(山) 주변을 맹렬히 수색하고 있다.
그러나 군부의 이러한 소탕과업은 산악지대와 「쟝글」 습지(濕地)와 「후크」단에게 활동본거지 역할을 하는 거대한 사탕 경작지 때문에 막대한 곤란을 받고 있다.
이러한 새로운 무장 「후크」단 활동의 급격한 준동을 종식 시키는 매우 힘든 일이나 군참모총장 <마누엘 F. 카벨> 중장은 다음과 같이 경고하고 있다.
『「후크」단은 「의회투쟁」으로부터 무장투쟁으로 전술을 변경함으로써 필요이상의 살상을 초래하고 있고 정부에 반항적인 살육을 계속하는 한 전 「비율빈」 군사력을 동원하여 가차없이 선명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