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史(사)를 만든 사람] (5) 정신분석 학자 시그문드 후로이드(Sigmund Freud)
발행일1961-07-02 [제285호, 2면]
■ 생애
「오지리」 태생 정신분석학자.
1856년 5월6일 「모라비아」의 「후라이부르그」에서 「유태인」 혈통 집안에서 출생하여 「비엔나」에서 교육받았다.
학생때 처음에는 화학(化學)과 식물학(植物學)에 뜻을 두었으나 1882년에 의사 자격을 받았다.
1884년에 <샤르꼬> 밑에서 신경학(神經學)을 연구하기 위하여 「파리」로 갔다. 연구의 결과는 「히스태리」의 심리학적(心理學的)면과 근친정신증후(近親精神症후)에 대하여 전념했다.
1920년에 「비엔나」대학 교수직에 임명됐다.
■ 사상
<후로이드>는 「히스태리」를 정신적으로 발생하는 병증(病症)이라고 한 <샤르꼬>의 학설을 확대하여 고통스러운 경험이 점점 정신적으로 극복할 수 없고 또한 도덕적으로 극복되지 않고 충동적(衝動的)으로 억압(抑壓)되어 의식(意識)에서부터 분리된다는 것을 명백히 하였다.
이 고통스러운 경험은 「억압받은 감정」으로서 「무의식 중에 활동하고 따라서 정신적 장해(精神的障害) 즉 예를 들어 「이유 없는 죄(罪)의 공포(恐布)」 「히스태리」성마비(性痲痺) 강박현상(强迫現象) 등을 야기(惹起)한다. 이 억압된 체험(體驗)은 소위 「대행형태」(代行形態) 「가면」(假面) 및 「상징」(象徵)으로 되어 나타나나 이것이 의식(意識) 속에 놓여지고 동시에 억압된 감정이 「해방」(解放)될 때 처음으로 이 장해가 제거된다 하였다.
<후로이드>는 이 무의식(無意識)을 해명하기 위해 (정신분석 精神分析이라고 부름) 처음에는 최면술(催眠術)을 사용하고 나중에는 임의(任意)의 낙상(落傷) 방법과 또한 꿈의 해몽(解夢)을 사용하였다.
<후로이드>는 자기 독자적인 성욕설(性慾設) 및 정신분석적(精神分析的) 세계관으로서 치료법을 개악(改惡)하였다.
그는 성충동(性衝動)의 요소(要素)를 「젖먹이」에서도 찾으려 했다. 그가 성충동이라고 생각한 것은 먼저 「리비도」 즉 모든 기관적 쾌락(器官的快樂)이며 또한 일체의 충동을 말하는 것이었다.
<후로이드>에 의하면 특히 억압받기 쉬운 것은 소위 「에디프스」 복합(復合), 즉 이성(理性)의 부족에 대한 아이들의 근친상간적 욕정(近親相姦的慾情)이며 동시에 아이들은 동성(同性)의 부모에 대하여 경모(敬慕)함에도 불구하고 질투적 증오(嫉妬的憎惡)를 가지고 있다고 하였다.
이럴때에 문화로 인한 금제(禁制)는 근친상간적 욕정의 억압 및 부모에 대한 증오를 방지하도록 이끄나 어려운 성적(性的) 「에네르기」의 일부는 억압되지 않고 고도의 문화적 행동으로 변형(變形)한다.
따라서 종교 도덕 사회의식 등은 이러한 성충동(性衝動)의 승화(昇華)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고 <후로이드>는 자기의 정신분석적 세계관을 세웠다.
■ 비판
<후로이드>는 억압(抑壓)과 승화(昇華)가 전체문화 종교 및 도덕을 생기게 한다고 하고 따라서 이들은 단순히 성충동의 부대현상(附帶現象)이라고 보았으나 그리스도교적 심층심리학(深層心理學) 및 인간학의 기초(基礎)에 입각하는 정신료법은 방법의 유사(類似)에도 불구하고 <후로이드>적 형식의 분석과는 본질적인 차이가 있기 때문에 <후로이드>식 성욕설(性慾說)은 유지될 수 없다. 또한 일반적으로 <후로이드>적 인간학은 인간에 있어서의 정신권(精神圈)을 결코 정당히 평가 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