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성신강림 제19주일이며 내주일은 전교회주일이고 그 다음주일은 예수그리스도왕첨례이고 다음달인 11월에는 연령성월을 우리가 맞이합니다.
그래서 다음주일에는 전교회에 대한 강론이 있을 것이며 또 다음주일에는 예수 그리스도왕과 서울본당 주최인 성체거동이 있는 관계로 성체께 대한 강론이 있겠고 하여 오늘은 가톨릭신자들이 각별한 신심을 가지고 마지하는 연령성월에 앞서 죽음에 대한 강론을 하고저 합니다.
이 찬류세상의 괴로움이 얼마나 크고 또 얼마나 많은가를 내가 이 자리에서 여러분에게 자세히 말씀드릴수도 없거니와 또 그럴 필요조차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누가 그 사실을 부인하겠읍니가. 또 누가 그 수를 세어볼 수 있겠읍니가. 그러므로 나는 여기에 대해서 간단하게만 말씀드리겠읍니다.
우리의 원조가 낙원에서 쫓겨나온 이래로 그리고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고통을 느끼는 그때부터 우리는 우리 육신과 영혼 위에 내려진 천주님의 저주를 받아야만 되었읍니다. 먼지에서 나고 먼지로 다시 돌아가야만 될 우리 육신은 이 얼마나 큰 고통에 쌓여있읍니까. 노동과 수고 궁핍과 가난 굶주림과 목마름 더위와 추위 질병과 고통은 마치 한데 묶은 다발과도 같이 우리를 간단없이 되롭히며 날때부터 고통스럽게 태어났읍니다.
인간은 가지가지의 쾌락 속에 자기의 피난처를 찾아 그것에서 자기의 간단없는 육체적 고통을 될 수 있는대로 없이하고 평안을 우려보고저 애를 씁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발견하고 만들어낸 그 쾌락이 염증과 고통을 빚어내어 마침내 새로운 괴로움을 우리 육신에 가져오는 것을 볼 수 있읍니다.
비컨대 정도를 벗어난 술, 아편, 성적 쾌락 등을 생각하시면 그 사실을 잘 이해하실 것입니다. 이렇게 인간의 육신은 괴로움을 받고 있읍니다. 그런데 인간의 영혼도 그만 못지않게 괴로움을 받고있읍니다. 생각해보십시요. 염증과 불안 근심과 걱정 무서움과 슬픔이 우리 영혼을 괴롭히지 않는 날이 하루라도 있읍니가. 그 고통이 너무 심하여 올바른 이성을 가진 사람은 인생의 권태를 느기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괴로운 인생살이를 한탄한 끝에 스스로 제 생명을 끊어버립니다. 나는 지금 우리 일상생활의 경험에서 이 괴로움을 말씀드렸읍니다만은 성서는 이미 오래전부터 이 사실을 말씀하고 있읍니다.
그런데 성인과 열심한 보편적인 영육이 고통 외에 또 각별한 고통을 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세속육신 마귀죄에 빠지기 쉬운 본성 죄악적인 본성 죄악적인 정욕 유혹적인 쾌락 이것들은 총역습하여 선인과 열심한 그리스도 신자를 삼켜버리려고 덤벼듭니다. 이들은 원수와 위협의 큰 범뇌속에서 자기구령 문제에 대해서 공포와 전율감을 느껴야 합니다. 그리고 그들이 확고부동한 정신으로 자기구령사에 힘쓸지라도 그러나 현재 자기들이 천주께 사랑받는 자가 되겠는지 미움을 받는 자가 되겠는지 확실히 모르는 바이며 또 결정적인 구령의 마지막 성총을 천주께서 자기들에게 주실 것인이도 역시 모르는 고통을 남달리 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를 영육간의 이 허다한 괴로움중에서 구원하여 해방시켜줄 자는 누구입니가. 그것은 죽으밖에 아무도 없읍니다. 그런데 열심한 신자들을 이 영육의 허다한 괴로움 중에서 해방시켜주는 이 죽음을 성경은 죽음이라 하지 않고 잠들어 있다고 합니다. <다니엘> 선지자는 말하기를 『성인들은 땅속에서 자고 있다』라고 하였읍니다 그리고 우리주 그리스도게서는 죽은 <나자로>에 대해서 『나자로가 죽지 않고 자고있다』라고 말씀하셨읍니다. 그 이유는 죽음과 잠이 대단히 흡사하기 때문입니다. 잠은 깨어있을 때 고통받던 모든 괴로움에서 우리를 해방시켜줍니다. 자는 동안에 굶주린 자 굶주림을 모르고 목마른자 목마름을 모르고 근심하는 자 울지 않고 걱정하는자 슬퍼하지 않고 병자는 고통을 모르고 불행한자 불행을 모릅니다. 굶주린 자나 목마른자나 슬퍼하는자나 근심하는 자나 병자나 고독한자나 불행한자에게 있어서 감미롭고 갈망할 만한 것이 고통과 괴로움을 모르게 하는 잠외에 아무것도 없다면 우리 그리스도 신자들에게 있어서 우리를 일시에 영육의 모든 괴로움에서 해방시켜 주는 죽음외에 아무것도 우리에게 위안을 주고 갈망을 주는 것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구약의 열심한 사람들은 죽음을 태연하게 기다리었고 또 죽음을 원하고 갈망하였던 것입니다. 열심한 <도비아>는 말하기를 『주여 당신의 향대로 나안에 행하소서. 그리고 내 영혼으로 하여금 평안히 세상을 떠나게 하소서. 대저 나에게 있어서 죽은 것은 사는 것보다 더 나습니다』 하였고 의인 <시메온>은 『주여 너 말씀대로 지금 네 종으로 하겨음 평안히 세상을 떠나게 하소서』하고 부르짖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 우리도 죽음을 무서워할 것이 아니라 저 구약의 열심한 성인들과 같이 주안에 고요히 잠들기를 원하고 갈망합시다.
친애하는 신자여러분! 우리는 육신의 부활을 믿고 영생을 믿는 그리스도 신자입니다. 이성이 없는 동물은 혼과 육이 함께 죽고 또 영원히 죽고마는 것이지만 우리 인간의 영혼은 죽지 않고 영원히 살 것이며 우리 육신은 땅에 묻혀 썩어지지만 공심판날 다시 부활하여 영원히 멸치 않는 자기의 영혼을 찾아 다시 결합합니다.
「요안복음」에 『선을 행한자는 나아와 영생으로 부활할 것이요 악을 행한자는 나아와 죄로 판단함을 받기로 부활하리라』고 있읍니다. <욥> 성인은 자기 육신의 부활을 천주의 계시로 미리 알고 『나는 나를 죽음에서 건저줄 구속자가 살고있음을 알고 있다. 하여 그 육신으로 나의 천주를 바라볼 것을 알고 있다』라고 미신자인 자기 친구에게 말하였읍니다.
<나자로>의 누이 <말다>는 구세주께서 저에게 말씀하시기 전에 자기 오라비가 종국날 다시 살아날 것을 안다고 구세주께 말씀드렸읍니다. 그런데 만일 우리의 육신이 다시 살아날 것 같으면 우리의 죽음은 확실히 깨어날 잠에 불과하다는 사실이 확실합니다. 그러나 죽은 모든 이가 다시 살아날지라도 그 부활은 온전히 달읍니다.
왜냐하면 선자는 영생으로 부활할 것이오 악자는 영원한 죽음으로만 부활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죽음은 의인을 위해서만 달고 확실한 잠이 될 것이고 악인을 위해서는 영원히 죽을 불행한 죽음이 될 것입니다. 여러분! 악인의 영원히 불행할 죽음을 생각해보십시요. 악인의 죽음은 얼마나 불행하며 무서운 것입니가. 그 반면에 선인의 죽음은 얼마나 행복되며 즐거운 것이겠읍니까. 우리가 만일 선인처럼 죽기를 원한다면 선인들처럼 이 세상에서 살아야되겠읍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후부터 열심하고 서하게 살도록 진지한 결심을 하도록 합시다. 그러면 어떻게 사는 것이 열심있게 또 선하게 사는 것입니가. 그것은 천주를 두려워하고 사랑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고 악을 피하고 선을 행하며 우리 각자의 신분을 따라 살고 범뵈하였으면 즉시 고해성사를 받고 항상 깨어있어 죽음의 만단의 준비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생활 뒤에는 반듯이 행복한 죽음이 따라와 우리를 영생으로 부활하도록 할 것입니다. 『죽은 모든 믿는 자들의 영혼이 천주의 인자하심으로 길이 평안함에 쉬어지이다. 아멘』
金昌文(요셉) 神父(서울 新堂洞 主任)