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巡禮有感(순례유감)] 미리내 巡禮(순례)에 참가하고서
발행일1960-10-16 [제250호, 4면]
지난 9월 28일 1백10여년간 가톨릭신앙을 통해서 우리의 마음을 격동케 하며 열의를 고무(鼓舞)하고 있는 경기도 안성군하(安城郡下)의 「미리내」(美山里)성지(聖地)를 순례하는 성사(盛事)가 주한교황청사절서리 <무튼> 몽시뇰, 서울교구감목 <바오로> 노(盧基南) 주교를 비롯한 서울시내 및 경기도 내 각 본당의 50여명 신부와 각 수도단체, 경건한 남녀신도 등 3천여명이 참렬하여 복자 성웅(聖雄) <안드레아> 김(金大建) 신부님의 유해(Maxilla inferior)를 모시고 거동하는 한국가톨릭교회사상, 아니 미리내가 가톨릭과 인연있은 이래 초유의 성전을 보여주었다.
차임 여덟시 서울 명동 주교관을 떠난 <바오로> 노 주교의 전용차를 선두로 남쪽으로 남쪽으로 6십여 「키로」를 달리는 중도에 합세한 26대의 대형 「뻐스」와 10여대의 「트러크」가 줄줄이 이어 갔다. 유서깊은 우리의 성지로! 단정한 차림새, 경건한 태도로 「미리내」로 줄을 잇고 있는 수많은 신도에게 강복(降福)으로써 답례하는 정경은 화기에 한 자부(慈父)와 자녀간의 다사로움의 연속이다.
유해행렬은 정오 안치되어 있던 성요셉 성당을 떠나 5백 「미터」남짓한 곳에 위치한 복자 <안드레아>의 경당을 향해 장중히 진행되었는데 이 공전(空前)의 성사(盛事)는 이미 상세히 보도되었으므로 여기에는 생략하거니와 님의 푸르런 그 충절(忠節)의 여운(餘韻)은 영세에 이르도록 이땅에 메아리칠 것이다.
이제 평화롭고 고요한 신앙의 두메 「미리내」의 금석을 살펴봄으로써 성지(聖地)에 대한 인식에 이바지하려는 것이다.
1846년 9월 16일 순교하여 새남터에 가매장되어 있던 복자 <안드레아> 김신부의 시신을 의협무쌍한 이(李) <원선시오>에 의하여 이곳 「미리내」로 이장됨으로부터 한미한 이산협은 세기적 각광(脚光)을 받게된 것이다. 그리하여 「미리내」는 그당시 박해를 피해 모여든 교우들의 마을이였을 것임에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후 반세기에 걸친 사정은 자상히 알 수 없으나 「미리내」에 본당이 설립된 것은 1896년 <말구> 강(姜道永) 신부를 효시로 하여 65년간의 역사가 엮어저 있다.
1895년 사제에 서품된 강신부는 동 96년 이 거룩한 땅에 부임한 이래 마치 예수님의 생애와 같이 33년간을 하루같이 복음전파에 진력한 마지막의 장식으로 1928년 유서깊은 복자묘지에 경당을 건립한 후 동 29년 3월 12일에 67세를 일기로 귀천한 것이다.
강신부는 구령사업만으로서의 사제였을 뿐 아니라 교우들의 생활양상에 끼친 업적도 빛나는 바 있다. 그는 몸소 양잠(養蠶)을 권장하여 주민들의 생계를 윤택하게 하였고 다시 친히 주선하여 <요셉> 민(閔泳鍾) 씨로 하여금 「해성(海星)제사」 공장을 운영케 하여 교우가정의 수많은 부녀자를 취업케 하므로서 농촌진흥에 기여한 것이다.
영육양면으로 심사원리(深思遠釐)한 동신부는 사제양성에 주력하여 <도마> 이(李起俊) 신부를 비롯한 <베드루> 김(金永根=現 경기도 龍門주임), <요셉> 황(黃貞秀=서울교구 주교관) 신부와 이미 작고한 <바오로> 박(朴) 신부, <야고버> 김(金) 신부, <마지아> 오(吳) 신부 등 6명의 사제를 배출시킨 것이다.
복된 이 두메의 거성(巨星)이 사라진 뒤를 이어 <방지거> 육(陸嘉恩=佛人) 신부, <베드루> 최(崔文植) 신부, <요셉> 신 (申宗浩=現 로마 留學中) 신부 등을 거쳐 한때는 양지본당에 따른 적도 있은 「미리내」는 5대 주임으로 1959년 6월 <마두> 윤(尹亨重=전6 경향잡지 사장) 신부를 맞아 교중이 지극히 단란한 가운데 본당이 운영되고 있다. 8·15후 농지개혁이 실시된 때에도 법률에 의한 소유권의 이동이 확정된 것이 아니라 상호간의 우의적인 협의로서 아무런 파란도 없이 처리되었음이라든지, 본당유지를 위해 위토(位土)를 마련한 것 등 교회 내의 정항을 여실히 증좌한 것이라 하겠다.
「미리내」본당의 담당지역으로는 바로 본당 아래의 35가구의 2백2십명과 필산리, 석화리, 약산, 노곡리(以上 安城郡內), 곽산, 고초골(以上 龍仁郡內) 공소 등 1천5백명의 적지 않은 세대를 거느리고 있으며 거의 전부가 넉넉하지는 못하나 자작농(自作農)으로 자자영영하고 있다.
교중은 지극히 화목하며 그옛날 성당을 건립할 때에는 모든 교우들이 낮에는 건축공사에 부역하고 밤에 농사일을 한 것이라는데 충직한 그 농민들에게 그해따라 대풍(大豊)으로 갚아졌다는 고사(古事)도 있거니와 이번의 성지순례를 앞두고 부락민들은 사흘동안이나 도로 보수에 흔연히 동원되었다고 하며 그들은 「복자 안드레아 김신부님이 우리에게 복을 내려주며 「미리내」고장을 발전시켜 주신다」는 굳은 신뢰를 갖고 있다.
그리고 6·25때만 하더라도 공산역도에게 점령당한 바 있으나 지성소를 비롯하여 아무런 피해를 입힘이 없이 퇴각했음을 결코 우연에 돌리지 않고 있다.
소쿠리처럼 둘른 오두현(烏頭峴=복자은데라아 경당 위치) 다양한 터전에 복자 <안드레아> 김신부의 경당 앞에는 복자의 무덤자리를 좌우로 고(高) 주교, <말구> 강(姜) 신부, <베드루> 최(崔文植) 신부가 안장되어 있으며 경당과 평행(平行)한 곳에 복자의 자당인 고(高) <울술라>의 분묘가 종궁부활의 날을 대망하고 있다.
끝으로 느껴지는 것은 1929년 벽두 남곡리(南谷里) <말구> 박(朴) 신부의 인솔로 70여명의 청년이 이 성지를 순례한 후 참으로 30여년만에 이번의 성사(盛事)를 본 것이다.
우리가 말끝마다 순교선렬을 자랑하면서도 실제로 복자와 순교자를 위한 현양운동(顯揚運動)이 띄고 열의는 과연 자족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인가?
이미 사실(史實)을 수집하여 성청에 전달되어 있는 시복조사가 부진중에 있음을 상기할 때 후생인 우리들의 복자현양운동에 한층더 노력해야 할 것이 간절히 요청되며 물심양면으로 협조가 있어야 하겠다. 간단함이 없는 정성어린 기구가 요망되는 것이다.
또한가지 이번 순례행사중 느낀 것은 참례 교우들의 태도가 성지를 참배하러 온 것이 아니라 소풍온 기분이 아니었는지 저윽이 반성해야 할 것 같은 충동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