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歐羅巴(구라파) 기행 - 본대로 느낀대로]
발행일1960-10-16 [제250호, 4면]
「로오마」의 첫날밤은 진정 가슴설레임을 진정하기 어려웠다. 마침 국제가톨릭청년연맹 동서회의가 있어 참석하게 된 기회에 틈틈이 관광 「뻐스」로 시내는 물론 80키로 40키로씩 밖으로도 나다닐 수 있었다. 「로오마」의 하늘은 저 창창이 우거진 「팔마」 「오리브」나무 끝에 한없이 퍼전 「고발트」 「뷔엔나」서 기차로 꼬박 24시간 내려와서는 완전히 여름 옷으로 가라입고 말았다.
「베드루」대성전에서 「미사」참례를 하고 나와서 그림에서 노상 대하던 횡하니 둘러 싸인 광장 한가운데 서서 내가 뭣을 느껴야 할텐데 하면서 어리둥절 했을 따름이다. 「성바오로」 「라테란의 요왕」 「성모설지전」등 어마어마한 대성전 그 찬란한 미술품 그것이 분명 나의 전신을 자극했을진대 짐짓 붓으로 옮길만한 말꺼리가 없는 것은 무슨 연고일까. 그러나 「까타콤브」(도미틸나에 갓었다)에서 「미사」에 참례하고 주머니를 털어 은고상을 한개사들고 나왔을 때 소박비가 사정없이 내려 퍼붓는데 마음은 푸리기만 하다.
뭣인가 이제는 잊을 수 없고 또 잊어서 안되는 것을 얻어가야 한다는 생각에 사모처 은십자가를 다시한번 쥐어 보았다.
<수비아꼬> 이곳은 「로오마」시에서 80「키」나 떨어진 곳이다. 이곳 첩첩산중을 다시 20분이나 산허리를 타고 맴돌아 들어서야 성 <분도>성인이 은수하여 그의 위대한 「성분도」 수도원 창립의 공을 쌓은 곳이다. 산마루에 굴을 파고서 세개의 봉쇄수도원을 세워놓았다. 그안에 파고든 정적(靜寂)을 흔드는 성초들이 불타고 있었을 뿐이다. 「까타콤브」에서의 그것과는 달리 다정다감(多情多感)하던 수년시절 어디를 피곤히 쏘다니다가 깨끗이 발씻고 따뜻하고 말쑥히 치워둔 내 방으로 들어선 것 같았다.
교황 <요안> 23세 성하를 뵈옵는 날, 이날은 말쑥히 차려입고 머리고 가다듬고 신발 마저 깨끗이 닦아 신었다. 「까스텔 간돌프」 그 호반(湖畔)을 끼고 짙은 나무그루들 「크레온」칠을 해둔 것만 같다. 청년연맹 사무장 <빠피스까> 박사와 나란히 일찍부터 몰려든 수천군중을 헤치고 「스위스」병의 특별 양해를 얻어 성하의 차가 닿아 어좌호 갈아앉는 곳에 자리잡았다. 정각 11시 1분전에 바티깐 「1호」차가 내려 닿자 일반알현소 안에서 모였던 군중은 높이 부르던 「살베레지나」도 그치고 『비바레일 빠빠』 교황 만세, 만세 하고 뒤끓는다.
만면에 미소를 띠우신 <요안> 성하 나의 2「미터」 앞에서 손을 드신다. 껑충 뛰어가 안기고 싶은 걱정을, 실은 「스위스」병에게 점잖이 서 있기로 다짐을 받은 바 있다.
성하의 얼굴은 팔순노인이 아니라 어느 미소년 같기도 「싼타크로스」할아버지 같지도, 그보다 성자의 얼굴이 분명했다. 내가 여지껏 그림에서 본 성인의 얼굴은 다 그런것으로 안다. 성하의 목소리는 분명하고 맑고 힘차면서 높다.
천주성자의 죽음으로서 이룩한 구속사업은 성 <베드루>에서 부터 지금 저분의 손에 그 열쇠가 맡겨졌으며 그토록 원하던 인류의 소망(평화)의 문은 아직도 아직도 활짝 열려지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성하는 처음 몇마디로 군중을 웃기시고 오직 기구와 희생으로 악을 쳐 이겨야만 거기서 승리해야만 승리자의 영광을 차지할 것이라고 말씀을 계속하셨다.,
다른날 「베드루」광장에서도 정각 열두시 성하는 거실의 문을 걷고 군중 앞에 나타나 같이 삼종을 바쳤다.
在歐 學生會
연중 한 1천5백만명은 되리라고 보는 「로오마」 방문객, 그 대부분은 가톨릭순례자인 것이 분명하다. 거기다가 금년은 「올림픽」 경기까지 있었던 것이다.
매일 그저 한 천명씩은 자고 먹고 하는 것 같다. 「구라파」 우리 유학생들이 고적순례와 올림픽 한국선수단을 돕고 응원하기 위해 이곳에 모였다. 이들은 일년에 한번씩 있는 피정신공에 어려운 조건을 무릅쓰고 멀리 북독(北獨), 불란서, 오지리, 스위스에서 왔으며 신학생도 다수 참가하였고 그들과 섞여 재구(在歐) 우리신부님들이 전원 나온듯 하다.
<백남익>(白南翼) 지도신부의 주선으로 숙소 관광 「뻐스」까지 불편없이 마련된 듯하고 <안드레아> 최 신부의 강론, <바오로> 이 신부의 견진지도, <스테파노> 김신부의 입신자 지도 그리고 <그레산도> 이신부, <프로리아노> 정신부, <분도> 김신부 <요셉> 안신부 <발라바> 김신부 <바시리오> 유신부 등이 몸소 학생들과 개인 접촉을 했다. 한편 「앗시지」를 찾은 그들은 <차복재>(車福載)씨(스위스)를 회장으로 그리고 서울 <ㅡ말가렛다> 정씨를 사무책임자로 하는 재구유학생회를 결성, 가을엔 회지(會誌)까지 내게된다고.
<백남익> 신부는 가벼운 체구에 차까지 몰고 날쌔게 다니는 것이 그러해야만 이리저리 밀린 일들을 쳐내는 듯 했다.
- 스위스로 가면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