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포] (73) 木浦(목포) 京洞本堂(경동본당)
小農·商의 안식처
儒達山을 屛風삼아 公所는 섬에 散在해 있고
발행일1961-07-02 [제285호, 3면]
기차가 목포를 가까이 할수록 해풍은 옷을 휘감고 4월 오후의 따거운 햇빛과 함께 습기는 몸을 더욱 눅진하게 한다. 소금강(小金剛)이라는 유달산은 용암(熔岩)의 덩어리다.
목포시내에서도 최남단 가까이 있는 경동(京洞)본당은 유달산을 병풍삼아 「프로테스탄트」의 한 교회와 정(情)답게 마주보고 있다.
왼통 돌로 세워진 성당이라 바다 가까이 있다하여 폭풍에 쓸어질리는 없을 것 같다.
건평 215평이라는 이 성당 둘레와 부지 670평의 사방은 꽃으로 채색(彩色)되어 있다.
초대주임 <빅도리노> 김(金成煥) 신부님이나 전 주임이며 얼마전 이곳을 떠난 <모이세> 김(金成道) 신부님은 600명의 교우를 산전동본당서 데리고 살림나와 본당을 창설하여 한편 꽃심고 가꾸기에도 무척 애쓰셨음이 짐작된다.
불행히 기자가 방문했을 때는 새 주임 <요안> 김(金若望) 신부님이 다섯섬의 공소를 순방하려 나간 후라 직접 뵈옵지를 못했다. 듣기에 키가 훌씬하게 크고 얼굴이 검게 탄 신부님은 대단히 활동적이라고 한다. 그러니 이 성당을 안의 푸르고 붉은 화초들이 피로를 풀어주려니 생각하니 안성맞춤인 것 같다.
이 본당은 처음 <빅도리노> 김신부님이 1952년 11월 목포 산정동본당서 60명의 교우를 분리하여 본당을 창설하여 1956년까지 새 살림을 차렸고 2대가 <모이세> 김신부님 3대가 현 <요안> 김신부님이다. 이 세 신부님은 그간 약 2천9백명의 교우를 얻었다. 그러니 불과 8년 반, 그동안 애쓰신 보람이 바로 이것이다. 우리나라에 이씨 김씨가 흔하기로 유명도 하지만 세 분 김신부님들은 대를 이으면서 훌륭한 전통을 세우려 한다.
현재 이 본당에는 공소가 다섯이며 그것도 전부 섬인데 경동본동(本洞) 교우는 2,826명이고 공소교우까지 합하면 3,468명이라 한다.
그러나 이들 대부분은 노동자거나 소상업을 하는 교우들이며 공소는 발동기선 20마력으로 2시간을 가는데서 여섯 시간을 가야 하는 곳 등 복잡한대 목포 주변에는 약 3백개의 대소섬이 있다 한다. 공소교우들은 농민과 어민들이라 본당회장은 <누수> 김(金龍基=木浦南工會議所議員)씨 뿐인데 씨는 본당 창설 때부터 세 신부님을 보좌하며 교우와 신부 그리고 천주와 영혼 사이를 굳게 맺으려 애쓴다. 본당신부는 바뀌어도 아마 평생을 두고…. 전교활동을 도우는 「악숀」(활동) 단체는 9개의 「쁘레시디움」이다.
보좌 <로엘 방지거> 신부님은 『주임신부님이 계시지 않아 잘은 모르겠으나 오신지 얼마 되지 않아 아직 새 방침이 없다』고 한다. 그러면서도 7개월 전 「진도」(珍島)서 이곳 보좌로 온 후 느낀 소감이라면서 『나는 이곳 사람과 섬사람을 간혹 비교한다』고 한다. 아직 젊어 보이며 한국온 지 2년째 된다는 이신부님은 『섬사람들이 온순하고 단순하여 마음에 든다』고 하며 『목포시의 도시생활을 하는 빈민에 가까운 서민층을 동정하여 그들 생활이 속히 안정되어 따뜻한 가정생활에서 천주님의 강복받고 행복할 수 있길 바란다』고 강조했다. <로엘> 신부님은 특히 학생 문제를 강조했다. 『그들은 피상적인 것에 너무 열중하여 간혹 열심하지 않은 것 같다』고 역설한다.
성당 마당으로 나오면서 작별인사를 하는데 꼬마들이 모여들며 자꾸만 신부님의 손을 잡고 끌며 놀자고 성화다.
농민, 어민, 노동자가 많다기에 JOC운동을 권했더니 대단히 구미가 당긴다고 하며 앞으로 연구해보겠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