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포] (45) 서울 龍山(용산)
건축연속의 성당
서울을 휘워잡는 展聖台(전성대)
굳건한 조직 신앙의 곳
발행일1960-10-23 [제251호, 3면]
원효로 종점에 내려서 올라가노라면 서울에서 제일 높은 언덕에 성당이 바라다 보인다. 여름이 되면 피서지로 안성맞춤인 것 같다.
성당마당에 올라서서 서쪽을 바라보면 한강하류와 「당인리」 발전소, 또 밤섬(栗島)과 성지 절두산이 서로 어울려서 마치 한폭의 그림같이 아름다운 운치를 이루고 있다. 남쪽은 여의도비행장, 새남터, 철교를 빤히 바라볼 수 있다. 동쪽엔 남산(南山)과 명동성당이 내다 보이고 북쪽으로는 신촌일대 즉 서강대학, 이화대학, 연희대학 등이 시야에 들어온다.
이렇게 서울시내 아름다운 경치를 관망할 수 있는 위치에 자리잡고 있는 이 성당은 왜정때인 1932년 지금 대전교구장 야드리아노> 원(元) 주교가 초대 본당신부로 부임하였다.
부임한지 13년후인 1946년엔 <레오> 정(圭良) 신부가 두번째로 이곳을 다스렸다.
제3대는 <에몬드> 차 신부가 있었고 현명동당가인 <이시도로> 박(朴喜泰) 신부가 잠시동안 있다가 1954년 11월 6일 현 주임 <분도> 조(趙昌熙) 신부가 부임하여 오늘날까지에 이르렀다.
이 성당의 유래를 더듬으면 1932년부터 1944년까지는 원효로 4가 소재 신학교성당이 원효로본당으로 사용되어 오던 중 1944년 7월 산천동(産泉洞 山1번지)에 본당을 신축하였으나 6·25동란중에 폭격소실당하여 주일학교 회관을 성당으로 사용하여 오다가 1954년 7월에 70평짜리 성당을 착공하여 당시 『AFAK』 물자와 교우들의 성의로 총공사비 7,571,000환을 들여 동년 12월 5일 낙성식을 보았다.
1955년도엔 21평 되는 사제관을 1백십만환을 들여 건축하였고 1957년도에는 성당이 좁아 50평을 늘여 총 1백2십평짜리 성당을 만들었는데 이 증축에는 순전히 교우들의 성금으로 이루어졌다고 한다.
현재 사제관 옆에 수녀사택을 신축중인데 지난 9월 12일부터 착공하였고 머지않아 준공되리라 한다.
이렇게 용산성당은 「건설의 성당」으로 연상된다.
성당 남쪽으로 숲이 있는데 여기에는 성직자묘지가 수없이 있고 「바오로」수녀원에서 경영하는 「百合유치원」이 있다. 유치원은 1955년 4월에 시작하였으며 현재 원아수는 80여명이라고 한다.
교회활동은 어느본당보다도 조직적이어서 구역별로(22구역) 남녀회장이 둘씩 있어 44명이 있다.
14세 이하의 아동예비자들은 매주 금요일 하오 4시에 지도를 받으며 대인 예비자는 남녀 각 동반별로 매주 열시 「미사」 후에 각기 수녀와 회장에게 지도를 받고 매주 금요일엔 오전 8시부터 하오 8시까지 총찰고를 본당신부가 한다.
어린이만은 토요일 일요일만 빼놓고는 매일 하오5시에 있다. 주일학교는 아동연령별로 매주 상오8시 단체 「미사」 후에 수녀들이 수고를 한다. 이외에 중학생반과 고등학생반도 따로 주보성인을 정하여 활동을 한다.
용산본당에는 오래저누터 부인들의 「성모회」가 다연 우수한 성과를 내고 있었는데 이에 필적할만한 장년들의 「성요셉회」가 지난 여름에 발족하였다.
또한 市35세 미만의 남녀혼성을 이룬 청년회가 있다. 이렇게 1년 열두달 조금고 한가한 틈이 없이 짜여진 이 조직엔 기자나 다른분들이 모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매달 첫주일에는 회장들의 모임이 있는데 이들 회합에는 출석보고가 있어 1년동안 세번이상 결석하면 다음해엔 그자리를 물러서게 되었다. 그리고 회장에 임명될 때에는 성당에서 선서식을 한다.
이들의 활동은 잡지를 가가호호 돌려주며 교무금은 각 구역회장들이 모아서 1개월동안의 수확을 첫주일 회합때 보고한다.
그밖에는 대세를 붙여주며 전교활동에 힘쓴다.
매월 둘째주일은 「성요셉회」의 정기회합일이고 셋째주일은 「청년회」, 마막주일은 「성모회」의 모임날이다. 현재 신자수는 3천5백여명이나 된다.
건설의 신부 <조> 신부는 금년의 희망은 「성당빛」을 다갚도록 할 것과 주일학교를 6개반을 만들고 수녀사택을 완수하는 데 있다 한다. 이것이 성취되면 구역적으로 「단체활동」을 강화시킬 작정이시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