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지오」활동에서 가질 家庭訪問(가정방문) 정신
발행일1960-10-23 [제251호, 4면]
「레지오」 활동의 한가지 방법으로서 가정(家庭)을 방문하는 일을 『사도직(使徒職) 수행의 열매』라고 간주하는데 명확히 말해서 그것이 즉 「레지오」의 특색인 것이다.
다른 가톨릭 활동단체는 다방면으로 사도직 사업을 수행하고 있어 활동하는 범위가 대단히 광범하고 다양성(多樣性)을 띄고 있으나 「레지오」의 가정방문과 같은 특수성을 찾아볼 수 없다.
그것은 또한 기이한 현상이 아닐 수 없지만 동시에 그러한 가정방문을 하기를 꺼리하는 뚜렷한 이유를 발견할 수도 없다.
가정은 사회의 요새(要塞)이다. 각종 사상(思想)으로 인해서 조성되는 모든 곤란에도 불구하고 가정은 언제나 견고하게 유지되는 것이다. 동등한 목적과 원칙에 입각하여 옛날 「스팔타」 형식의 학교 교육을 자녀들에게 시키도록 요청되기도 한다. 근대의 사회주의는 이러한 방법을 채택하지도 않고 가정의 존재조차 고려하지 않고 있다.
공산치하 중국(中國)의 현재 형태는 가정과는 아주 동떨어진 생활상태를 만들기 위하여 거대한 급습(急襲)을 재연하고 이으니 중공(中共) 치하의 가정실태를 볼량이면 남편과 부인이 서로 다른 「바락」에서 살고 있다. 아침 6시에 신호나팔소리와 함께 작업을 개시하도록 요구되고 밤늦게까지 노동시키기 위하여 마치 군대식으로 줄을 지어 작업장으로 나간다. 그들 부부는 단지 2주에 한번만 만나도록 되어 있다. 이것은 관념상의 생활을 영위하는데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일종의 발작(發作)적인 고통으로 줄다름치고 있다 하드라도 중국은 가정이라는 불명의 사상으로 다시 되돌아갈 것을 확신한다.
가정의 절대적인 중요성
가정을 가진 자는 누구나 지배권을 가진다. 종교를 이해함으로써 가정이 건실해진다는 것은 필연적 사실이다. 물론 종교교육이 가정에 있어서의 생명적인 요소이기는 하나 그것을 곧 생명을 구하는 일종의 망상으로만 여기지 않는 자들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포오랜드」의 공산 정권조차도 학교에서 종교교육을 시키도록 허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켜보라. 여기서 두가지 결론이 나온다.
첫째 냉정한 의미에서의 종교교육은 학교의 어느 다른 과목보담도 자녀들 마음 속에 가장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둘째 학교에서 종교교육이 훌륭히 시행되고 있다 할지라도 고립적이고 원조정신이 없는 위치에 놓여 있는 세계에서는 많은 시련과 논쟁이 수반된다는 것이다.
여기에 영웅적인 경험담이 있다.
지난 세기(世紀)를 통하여 「프랑스」에서는 국가를 교회로 복기(復歸)시킨다는 구실 아래 학교에는 신앙심을 저지시킨 바 있었다. 놀랄정도의 노력과 희생을 경주하여 가톨릭 학교의 건물과 운영면에 오늘날 같은 결과를 가져왔다. 이로서 위대한 일을 완수한 셈이긴 하나 전체적인 이론은 각 가정에 있어서의 협력 없이 즉 혼배상태를 벗어나서는 할 수 없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자녀들은 천주 없는 가정에서 살고 있고 생활 방도만을 결정하는 가정이 되어버렸다. 여기서 사회의 요새(要塞)인 가정을 그대들에 말하고 그대들로 하여금 가정으로 들어갈 수 있는 특권을 부여하고 싶다.
「레지오」가 이러한 사업을 시작하지 않으면 거의 직접적으로 흔들리게 된다. 지방에 따라서 가정이라는 개념이 서로 다르다. 「아프리카」에서는 우리들의 가정생활보다 더욱 밀집(密集)한 집단 형태를 이루어 살고 있다. 그대들 이러한 사회에 침투하여 그대들의 위대한 사업을 수행하라. 이것이 곧 「레지오」의 주장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