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포] (74) 全北(전북) 裡里(이리)본당
위성세력 형성에 전력
老兵(노병)은 물러서지도 않아
발행일1961-07-09 [제286호, 3면]
만리장파 호남평야--황금물결이 끝없이, 굽이굽이 치는 풍경은 가을마다 이곳서 볼 수 있는 생명선의 믿음직한 상징이다.
대전, 논산을 지나 호남의 요충(要衝)은 이 「이리」가 차지하고 전주, 광주와 군산 3방(3方)으로 갈라 놓는다.
다닥 다닥 붙어섯는 고층건물이나 옹기종기 능선이 잇다은 산들만을 좌우로 쳐다보다가 푸른 하늘이 시야에 활짝 터지면 한결 마음은 넓어지고 여객들은 아지랑이 속에 잠긴 산들을 더듬으며 차창에 몸을 의지한다.
「이리」역에서 중앙통을 가다가 약간 언덕진 고개에 들면 바로 왼손편-북창동 235번지에서 「이리 천주교회」를 손쉽게 찾을 수 있었다.
성당 문을 들어서면 눈앞에 우리나라 성당의 전통적 벽돌건물이 장애를 받지 않은 채 좌우로 길게 놓여있다.
성당 대지 2천평에는 별다른 손질이 가 있지 않는 한 가운데 150평의 예수성심을 주보로 한 성당을 받들고 있다.
1931년 군산이 본당이 되자 4년 후 재빠르게 이 「이리」를 공소에서 본당으로 승격시켰다. 현 경기도 평택본당 주임 <요셉> 하(河漢珠) 신부는 1935년부터 1939년까지 새 살림을 차리면서 시내 주현동(株峴洞)에 400평 부지를 사들여 「성당」과 「신부사랑」을 지였었다.
하신부 뒤를 이은 <비리버> 김(金基奉) <베드루> 김(金榮九) 신부의 대는 순조로웠다.
제4대 <도민고> 이(李基順) 신부 때에가서 왼겨레에 퍼부은 만행 괴뢰의 남침은 시내 중앙으로 모시려는 천주의 이집 짓기를 멈추게 했었으나 수복 후 완공을 했다.
5대가 <바오로> 김(金俊生) 신부이고 현 주임은 <요셉> 정(鄭在石) 신부이다.
1955년 현 성당을 완성한 전기 이 신부는 당시 2200명 교우들과 더불어 주현동서 이곳으로 옮겼다. 그리고 공소 하나와, 정신부는 지난 3년 반 동안에 700명을 영세시켰다.
공소 아홉을 설치 했고 그 중 「황등」을 본당으로 승격시켜 살림냈고 공소 여섯을 인계했다고 한다.
「이리」 「꾸리아」에 속하는 5개 「쁘레시디움」이 정신부를 도운다.
정신부는 『지금 장로 한 사람과 집사 등 「프로테스탄트」 신자 7·8명이 개종 준비를 하고 있는데 그들은 체면 때문에 주저한다』고 하면서 실망은 않는다고 한다. 정신부는 계속해서 『나는 여론을 환기시키고 있어요. 즉 반공하는데나 부패를 막기 위해서는 「가톨리시즘」만이 이를 막을 것이라고 그리고 종국적인 행복을 줄 것이라』고.
그런데 이 정신부는 전교방법을 병법이나 정략적 방법에 기초를 두고 있다.
정신부는 『집을 지어도 울타리가 없어보시요, 그것은 완성이 아닙니다. 울타리가 든든 해야지요』하면서 자기는 지금 위성세력(衛星) 형성에 주안(主眼)을 두고 공소 늘이기에 온 힘을 다하고 있다한다. 과연 사실은 그렇게 증명한다.
익산(금마)에 공소가 섯고 팔봉에도 공소가 섰으며 58평짜리 강당이 섰다. 특히 이 팔봉은 동민 전원이 입교를 원한다고 서명날인까지 하여 정신부를 찾고 교리강습을 자칭하여 놀라게 했으니, 그러나 사전 노력은 순탄하지 않았다 한다.
춘포, 오산에도 곧 공소가 생길 것이며 「황등」과 6개 공소가 서서 갈려낫고
정신부는 현 공소 중 곧 본당이 될 곳도 있으며 공소 강당도 5·6개소에 세울 작정이라고……
성직생활의 거의를 부산교구서 보낸 정신부는 고향인 이 전주교구서 본당을 자립할 수 있게까지 세워 올렸다.
노익장(老益壯)은 죽지 않고 그렇다고 물러나지도 않으며 되려 앞으로 앞으로 나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