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과 우리 民族(민족) 護敎(호교) (1)
발행일1961-07-09 [제286호, 4면]
여기는 신자들도 계실 것이고. 신자를 아니지만 가톨릭의 대강령을 아시는 분도 계실 것이고, 다음으로는 가톨릭이 무엇인지 전연 모르시는 분도 계실 것입니다. 나는 가토릭을 전연 모르시는 분들에게 지금 말하는 바입니다.
이 우주는 천주께서 창조하셨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사람에게는 육신 외에 불사불멸하는 영혼이 있읍니다. 영혼이 있기 때문에 사람 사회에는 신이니, 정의니, 의무니, 하는 것들이 문제되어 옵니다.
집안에 부모가 안 계시면 별 문제이지만, 부모가 계시면 그를 공경하고 그의 뜻을 순종할 의무가 있는 것처럼, 대우주를 창조핫니 천주를 공경하고 그의 법도를 지킬 의무가 우리 인류에게 부과되어 있읍니다. 이 의무를 실행하는 것이 가톨릭의 첫째 취지입니다.
의무와 책임이 있으면 그것을 완수하는 것은 선이요, 그것을 저버리는 것은 악입니다. 선과 악이 구_되면 선에는 그만한 _수가 있고 악에는 그만한 제재 즉 벌이 있__ 직통하는 결론_다. 천주께서는 당_ 공경하고 당신 법을 잘 지킨 착한 사람의 영혼은 천ㄴ당에로 흘러가 복락을 주시고 __을 공경치 않거나 __하는체 하면서 악_ 행한 사람의 영혼은 지옥에로 보내사 영원히 벌하십니다. 우리가 죽은 다음 이 무서운 벌을 받지 않고 천당에 들어감을 구령(救靈), 즉 영혼을 구한다고 합니다. 이 구령이 가톨릭의 둘째 취지입니다.
천주의 존재·영혼불멸·천당과 지옥이라는 문제는 얼마나 자중한 문제인지, 여기 계실 무종교가들에게 깊이 생각하여 보시기 위하여 <빠스깔>의 대화 한 토막을 잠간 소개하여 드리겠읍니다.
<빠스갈>은 철학적 과학적 조예가 깊은 학자로서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다는 것은 여러분이 잘 아시는 바입니다. 그는 자기 친구 무종교자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읍니다. 나는 종교를 믿으며 살고 자네는 무종교자로 살다가 죽어보니 그때의 현실은 지금 자네가 인정하는 그대로이라고 가정하여 보세. 즉 천주도 없고 영혼도 없고 더구나 천당이나 지옥도 없고…… 그러니 자네는 무종교자로 살다가 없어지고 나는 신앙생활을 하다가 없어지고 마는 것일세. 무종교생활이 자네에게 무슨 유익을 주었는가 하면 그렇지도 않고 신앙생활이 내게 무슨 손해를 끼쳤는가 하면 그렇지도 않어, 그저 우리 둘 다 무해무덕하게 살다가 없어지고 말았을 것일세.
그런데 우리 죽은 다음의 현실이 지금 내가 인정하고 있는 바로 그대로이면 어떻게 되겠나? 나는 천당에 올라 영원한 복락을 누리고, 자네는 지옥불에 떨어져 영원한 벌을 받고 있으리니, 우리 둘의 처지는 이 천양지판이 아닌가?
그런즉 자네는 이 문제가 사실 그런지 안 그런지 알아보는 것은, 종교적 견지에서뿐 아니라, 이해타산의 견지에서도 불가피한 일이 아닌가? 사람들은 무슨 금전문제나 명예라든가 권리문제 같은 것을 두고는 밤에 잠을 안자고 생각하리 만큼 민감하면서도 이런 지중한 문제에 대하여는 생각하여 보려고도 않는 것은 인간본성에 역행하는 것으로서 악마적 신경마비일세……
천주·영혼·천당·지옥하면 흔히 묻기를 누가 그런 것을 보았느냐고 하는데 얼른 생각하면 그럴듯한 질문같지만, 좀 더 생각하여 보면 아주 몰상식한 질문입니다. 여러분은 어머니 뱃속에서 이 세상을, 푸른 하늘이며 넓은 벌판이며 기화이초며 오곡백과를 보고서 나왔읍니까? 중세기 <꼬베르닉> 신부가 지동설을 주장한 것은 억천만리 창공에 떠올라가서 저 아래 지구가 물처럼 데굴데굴 굴르고 있는 것을 자기 눈으로 보고서 그랬다고 생각하십니까? 과학발달사에는 이런 일이 여간 많지 않습니다.
대자연은 아무렇게나 된 먹칠이 아닙니다. 읽어보면 쪼옥쪽 읽어지는 한 작품입니다. 여러분이 연구하고 있는 물리학이니, 화학이니, 생물학이니, 박물학이니, 천문학이니 지질학이니 하는 과학서적은 이 대자연이란 작품의 몇 백분지 일면을 해설한 책입니다. 이 책의 저자가 없을 수 없는 것처럼, 꼭 마찬가지 이유로 저 대자연이란 작품도 그 저자가 없을 수 없읍니다. 그가 바로 천주십니다.
여러분은 인과률을 통하여 이 대자연의 「페지」 「페지」를 읽어보십시오. 원인과 결과의 연결선 끝에는 첫째 원인을 발견하실 것이고 우주에 충만한 운동 배후에는 첫째 원동자를 발견하실 것이고, 불완전한 물질 배우에는 자력으로 존재하는 완전무결한 존재를 발견하실 것이고, 우주의 정연한 질서 배후에는 무한한 정신적 존재를 발견하실 것이고, 사람마다 타고나는 양심의 배후에는 그 공동원인으로서의 입법자를 발견하실 것입니다.
빠스갈은 『무신론자 보다 더 경솔하게 믿는자는 다시 없다』고 하였는데 실로 지당한 말입니다. 무신론자들이 「무신론」을 아는 것이 아니라 기실 믿는 것입니다. 그 믿는 논거는 무엇이냐 하면 없읍니다. 기껏해야 『누가 보았느냐』하는 이것 뿐입니다. 경솔한 믿음이 아닙니까?
이제 영혼 문제를 생각하여 봅시다. 사람의 정신작용은 비물질적입니다. 그것은 빛갈도 없고, 냄새도 없고, 무게도 없고, 체격이나 면적도 없고하여 물질과 공통된 점은 하나도 없읍니다. 이런 비물질적 정신 작용이 물질적인 뇌수에서 나올 수는 없읍니다. 뇌수는 감각세계에서 들어오는 통신을 수집하고 보관하는 통신 영락처이요, 그에따라 육신이란 기계를 운동하는데 사역되는 운전대에 불과합니다. 활달무비한 비물질적 정신작용의 사령관이 저 엄격한 타성의 지배를 받고 있는 뇌세포일 수는 없읍니다.
체력(體力)하는 이 「역」은 건강 중에서 생기는 것도 아니고, 자립(自立)할 수 있는 것도 아닌, 한 속성(屬性)입니다. 이 「역」의 원천은 실체, 즉 「육체」입니다. 이 육체에서 저 체력이 나오는 것입니다. 사람의 정신력은 무서운 것입니다. 여러 백만광년 저편의 천체들을 연구하고, 현미경으로도 볼 수 없는 원자세계를 파고들어갑니다. 전신전화며 활동사진이며 「텔레비죤」이며 전송사진이며 자동전화며 하는 등의 현대 과학적 문명이기(利器)는 전부 이 정신력의 소산입니다. 이런 비물질적 정신력이 물질적 뇌수에서 나오는 것이 아닌 즉 그에 상응한 원인으로서의 비물질적 실체가 있음을 의심할 수 없으니 이것이 영체(靈體) 즉 영혼입니다. 이 영혼은 비물질적 실체이므로 물리적 파괴나 화학적 변화를 그 본질상 받지 않습니다. 즉 영혼은 그 본질상 불멸입니다.
세상에는 착한 사람이 고생하는 수도 많고 악한 사람이 행복한 생활을 하고 있는 수가 많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제1막에 불과합니다. 다음 막에로 넘어가서는 악한 사람의 영혼은 영원한 변화를 받고, 착한 사람의 영혼은 영원한 천국복락을 받을 것은 의심할 수 없읍니다. 대우주의 창조주시요 지배자시며 입법자이신 천주께서 이런 중대한 문제에 있어서 무관심, 무분별하실 수는 절대로 없읍니다.
(필자=신부·경향신문 사장) (다음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