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隨想(수상)> 레지스땅스
발행일1961-07-09 [제286호, 4면]
■ 생각혀지는 일
몇해 전의 일이다.
경북 왜관에 「베따니아의 집」이라는 무둥병 진료소가 있다.
그 당시는 <뻐딧 쎄르>(작은 姉妹會)란 가톨릭 수녀들이 돌보는 사회사업체였다.
경북대학교 의과대학 교수 K의사는 토요일마다 이곳을 찾아와서 환자를 돌봐주며 나병균 연구를 하고 있었다.
아무리 약을 쓰고 치료해도 굳이 썩어들어만 가는 것이 어찌도 안타까웠던지 하루는 환자의 팔-고름이 질펀히 배인 종처를 외국인 수녀가 입으로 빨아내는 걸 본 K의사는 깜짝 놀랐다.
『왜 이러십니까 수녀님? 나병균이 옮으면 어떡할라구요?』
수녀는 생긋 웃으며 대답하기를
『무얼요. 제가 어릴 때 넘어져서 정강이를 깬 일이 있는데, 어머니가 검은 피를 입으로 빨아주시더군요. 얼마나 시원했는지, 곧 낫던걸요』
이말은 K교수의 가슴에 짜릿한 감전(感電)을 주었다.
워낙 회의(懷疑)주의자요 무관심주의에 가까운 무신앙가 K의사가 과거에 읽은 어느 철학사적, 교양책이나 그가 들었던 그 누구의 강연, 설교보다 이 순간에 받은 감명은 일생 잊을 수 없을 거라고 그는 뇌까린다.
하루의 환자 치료를 마치고 어둑어둑해서 집에 돌아가는데 수녀들이 한길까지 배웅나왔다.
마침 둥근달이 땅거미를 헤치고 떠오름을 본 K의사는
『수녀님들, 고국이 생각나지 않으십니까?』
『왜 안나겠어요 어머니가 제일 보고싶어요』
그리고나서 수녀는 혼잣말로
『이런 밤이면 님도 그리워져요』
여기서 말한 님이란 초자연적인 님을 말함일 것이다. 그러나 이성(理性)이나 교리로 다져진 의무감보다 가슴에 포근한 정감(情感)을 발견했을 때 그의 놀람은 새삼스러웠다.
하직하고 대구행 열차에 올라탄 K교수의 가슴에는 착잡한 감정이 엇갈렷다. 그가 보는 가톨릭이란 냉냉하고 온기가 통하지 않은 강철 그대로로 알았었고 더구나 검은 「유니폼」에 깊이 몸을 싸고 고깔 쓴 수도자란 대리석 덩어리로만 알아온 터에, 보다 사람답고 보다 따스한 인간성에 접하여 그의 가톨릭관·수도자관은 일변하고 말았다. 그 후 그는 열심한 구도자(求道者)가 되어 영세 준비를 서둘렀다는 것이다.
■ 이웃 사랑
서울대학병원에 「작은자매회」의 한국인 수녀 한 분이 나가고 있었다.
의사도 간호원도 접근을 꺼리고 살아날 가망이 없다고 「사형선고」(?)를 내려버린 사기(死期)에 이르른 격리환자나 결핵균이 콸콸 쏟아져, 아무도 돌봐주는 이 없는 폐환자의 대·소변이며 뒤치닥거리를 도맡아 하는 이상한 여성으로 여기고들 있었다.
항시 얼굴에 웃음을 머금고 모든 이에게서 저버림 받은, 남들이 꺼리는 전염병 중환자만 찾아가서 그 「나자렛 사람의 벗들」에게 핏줄기나 이해(利害)를 떠난 봉사로써 삶의 보람을 느끼는 이 수녀를 복도에서 만나면 의사들이나 간호원들은 저절로 머리가 숙어진다고……
사랑은 말에 있음이 아니라 했다.
백마디 이론보다 본능화된 몰아(沒我)의 행동-그것이 <나>를 죽이고 남을 살리는 회생 그 자체인 때 강철같은 가슴이라도 햇빛 아래 눈꽃(雪花)마냥 녹힐 수 있음을 우리는 저 유명한 영국의 의사요 작가인 <크로닌>을 귀정(歸正)시킨 이름 없는 교우 간호원의 행동에서도 보아온 바다.
지금 그 수녀는 로오마에서 수련중에 있다.
(필자=가톨릭소년 편집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