來世(내세)와 燃獄(연옥)
諸聖(제성)첨례와 追思已亡(추사이망)을 맞아
발행일1960-10-30 [제252호, 4면]
가톨릭신앙생활에 있어 교회는 그 전례(典禮)를 통하여 11월을 죽엄에 대한 묵상(默想)과 모든 성인의 통공(通功)을 강조하는 달로서 우리 마음을 천당으로 향하게 하며 또한 연옥(煉獄)에 있는 영혼들을 위하여 선업(善業)을 바치도록 권고하고 있다.
인간은 원죄(原罪)의 벌로 한사람의 예외(例外)없이 언제인가 반드시 죽지 않으면 안되게 마련이다. 더욱이 죽음은 뜻하지 않은 때에 닥쳐든다. 그러므로 『사람이 죽는다는 것은 확실한 일이기 때문에 조금도 불안(不安)한 것이 아니지만 죽는 시간의 불확실한 그것이 사람을 불안케 한다』는 말이 있는 것이다.
죽음에 대해서는 옛날부터 여러가지로 사람들이 생각하여 왔다. 그러나 그렇다고해서 죽음이란 것이 호말도 변한 것이 없으며 의연히 죽음이요 의연히 숙제(宿題)이다. 어떤 이는 『모든 노력을 기울여 숙제를 해결하고 삶과 죽음을 초월(超越)하였다』고 한다. 또 어떤 이는 『우리의 영혼(靈魂)이라는 것들은 원자(原子)의 집합으로서 죽음이란 즉 그 원자들의 이산(離散)이다』고 말하고 있지만 역시 죽음은 아무 대답이 없이 의연히 죽음이다. 인간이 죽음을 어떻게 보던 간에 죽음의 인간에 대한 태도는 조금도 변함이 없다. 죽음은 현명한 사람(賢人)에게 임하던 태도로 어리석은 사람(愚人)에게도 임하시는 것이며 삶과 죽음을 초월하였다고 깨달았어도, 죽음을 정복(征服)했다고 자랑하여도, 죽음의 찰나에 있어서는 무지(無智)한 자나 같으며 만인(萬人)이 다같은 것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인 것이니 모든 것을 의심할 수는 있어도 이 사실을 의심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인류의 역사는 『죽음에 대한 고민(苦悶)의 역사』라 할만큼 이 최후의 순간을 위하여 살고 있는 것이 인간의 일생인 것이다.
임종(臨終)에 이르러 『내가 암(癌)으로 죽게되어 죽엄을 준비할 수 있는 시간을 가진다는 것은 나의 과분(過分)한 특권이며 나는 새로운 임지(任地)로 가는 기분이다』고 말한 어떤 신부가 있다.
무릇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신봉하는 신자들은 인간이 이 지상(地上)에 산다는 것이 잠시동안의 시험기(試驗期)를 겪는 것이오, 육체의 죽음이란 관문(關門)을 거쳐 영원한 내세(來世)가 시작된다는 것을 굳이 믿으며 또한 그 내세는 우리가 이 세상에 살고있는 동안에 세운 선공(善功)과 범한 악행에 대해서 천주께 햄바처 그 행위와 공덕에 대한 상벌(賞罰)을 받는 천당과 지옥으로 갈리어져 있다는 것을 믿고 있는 것이다.
천당은 천주의 거룩한 삼위(三位) 일체와 결합하고 그 직관(直觀) 속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마련된 곳이므로 어떠한 적은 악의 존재나 두려움과도 결합될 수 없는 행복의 고장으로서 조촐하지 못한자는 누구를 막론하고 들어가지 못하므로 많은 사람들이 그 영혼의 적은 죄(小罪)의 악을 지닌 채 혹은 영서함을 받은 죄에 대해서 충분한 보속(補贖)을 못하고 죽는다면 그로인해서 그들은 천주의 면전(面前)에 들어갈 자격을 얻지 못하는 것이며, 그렇다고 해서 지옥벌을 받기에 합당할만한 죄악이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이러한 영혼들이 조출하여질 연옥이 있다는 것을 가톨릭교회는 가르치고 있는데 연옥이 있다는 것은 극히 위안(慰安)적이고 합리적인 교리(敎理)인 것이다.
천주를 위하여 창조된 영혼은 천주를 제쳐놓고 달리 안식처(安息處)가 없는 것이다. 육체를 떠난 영혼이 창조되었을 때의 순결한 상태가 아닌 것을 알게될 때 천주와의 일이(一致)를 저해하는 장애(障碍)를 보고 그것이 연옥에 의해서만이 벗기어진다는 것을 때닫기 때문에 일순간의 주저함도 없이 연옥에 가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 장애를 제거(除法)하기 위해 예비된 이러한 방법(연옥)이 없다면 또 보속을 다하지 못한 죄 때문에 영혼은 자기의 종극목적(終極目的)인 천주께로 갈 수 없는 것을 알고 천주의 면전에 갈 수 없다는 것이 얼마나 불행한 것인가를 생각하면 그 불행과 비교하여 연옥을 조금도 나쁜 곳으로 보지 않으므로 영혼은 천주께로 즉시 가지 못하는 것을 더욱 마음 아파하고 죄에 대한 가책으로 괴로워하는 것인데 연옥 영혼들의 그 고통이 어떠한 것인지를 아직 물질적인 육체를 갖고 있는 세상의 우리들은 상상으로라도 다 헤아릴 수 없는 것이다.
연옥에 대한 가톨릭교회의 정의(定義)는 『영혼이 성총중에 있었지만 작은죄(小罪)가 있던가 또는 세상에 살고 있을 때 범한 죄의 시간적인 벌(補償)을 천당에 들어가기 전에 깨끗하게 기우기 위해 단련(鍛鍊)함을 받는 곳으로서 최후의 심판(公審判)까지 계속될 초자연(超自然) 상태의 장소(場所)』이다.
성경(聖書)에는 연옥에 대하여 상세한 것이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이것을 암시(暗示)하는 계시(啓示)는 여러곳에 있으며 이 연옥의 존재는 천주의 공의(公義)가 요구하는 당연(當然)의 당연인 것으로서 성경에 있어서의 천주의 계시를 확실히 이해하면 할수록 구령(救靈)에 대한 각 개인의 책임 개념이 더욱 뚜렷해지는 것이다.
구약(舊約)성서 지서(智書 10장 2절 민수기(民數紀) 12장 12절 열왕기(列王紀) 2의 13장 13-14절 등 구절은 모두 『죄의 용서함을 받아도 기워갚아야 할 시간적인 벌(時間的罪)이 남는다』는 사상을 말한 것으로서 연옥의 교의(敎義) 성립에 중대한 전제(前提)가 되게 하는 것이며 더욱이 신약(新約)성서에서는 『개인의 구령에는 개인의 협력이 필요하며 그리스도와 같이 보속을 해야하는 것』이라는 개념을 명백히 하고 있어 교부(敎父)들과 교회 박사들은 이러한 성서의 근거아래 연옥에 대한 신학(神學)을 형성(形成)하였다.
연옥에 대한 성서의 최초의 암시(暗示)는 「마카베오」후서(後序) 12장 43-46절에 나타나 있으니 즉 <마카베오>가 전사자(戰死者)들을 위해서 기도를 청한 사실은 사람이 죽은 후에도 영혼이 살고 있다는 신앙 뿐만 아니라 죽은 이들의 영혼에게 죄의 보속이 필요하다는 신앙도 나타낸 것이다. 가톨릭교회가 죽은 이를 위하여 기구하는 것은 이러한 구약시대부터 내려오는 개념에 근거를 두고 있는 것이다. 「라띤」교회나 근동(近東)의 교회가 죽은 이의 영혼을 위하여 기구하며 선업(善業) 특히 연 「미사」의 가치르 ㄹ지지(支持)하고 주장하는데 있어서는 처음부터 일치되어 왔으며 현재의 「미사」성제 가운데 죽은 자를 위한 묵념(默念)은 그것이 종도시대부터 있었던 것이라 한다.
교회란 그리스도에 연결되어 천주의 생명에 사는 영혼들, 즉 눈에 보이는 교회에 사는 지상의 신자와 보이지 않는 교회에 속한 천당의 성인 성녀들과 아직 보속을 다하지 못하여 연옥에서 단련을 받는 영혼들의 협동체(協同體)를 말하는 것으로서 이 영혼들의 일치협력을 모든 성인의 통공(通功)이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연옥의 영혼은 자기 혼자서는 죄도 지을 수 없지만 공도 세울 수 없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절대적인 상태에 있다. 천주를 사랑하고 있지만 천주와 일치할 수 없으며 죄에 대한 가책의 괴로움과 감각적인 혹독안 괴로움을 받고 있어도 그 고통이 공덕(功德)이나 기움이 되지 않으며 또 보상도 자기 혼자서는 얻을 수가 없으니 단련의 곳에는 용서가 없어 최후의 한홀까지 천주께 대한 부채(負債)를 갚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이러한 가운데 있는 연옥영혼은 세상에 있는 우리들의 기구와 선행의 원조를 가장 필요로 하고 갈망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가 장차 그들로부터 받을 천주대전의 전구(傳求)의 갚음을 생각해서라도 연령을 위하여 많은 희생과 선행으로서 그들의 연옥기간(期間)을 감소해주시도록 열심히 천주께 기구해야 하는 것이다.
『주여 연령에게 길이 평안함을 주소서, 영원한 빛이 저들에게 비치어지이다. 아멘』
연3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