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歐羅巴(구라파) 기행 - 본대로 느낀대로]
발행일1960-11-06 [제253호, 4면]
落葉의 感傷
「로오마」를 뜨는 밤, 소낙비는 사정없이 퍼붓는데 북행열차에 몸을 실으려니 까닭없이 서운한 생각이 감도는 것을 어찌할 수 없었다.
이튿날 창박으로 내다보는 「스위스」 그림엽서에서 보는 그대로의 산이요 들이요 숲이요 또 호수들이었다. 오정이 돼서야 목적지 「후리부르그」에 도착.
이곳서 <최정섭> <차복재> <김동수> 형들의 환대를 받았다. <김보균> 군은 잠시 여행중인 것 같고. 「후리부르그」대학의 교정엔 단풍이 물들고 있건만 10월 23일까지는 여름방학이다.
이곳서 공부하고 있는 우리 유학생 여러분은 방학을 지낸다기 보다도 그 지루한 방학을 견디어야 할 만큼 어떤 의미의 시간과의 대결(對決)을 하고 있는 듯 했다.
<김동수>씨의 책상 머리엔 부인과 아직 대면조차 못한 세살짜리 2세(世)이 사진을 모셔두고 눈씨름을 하고 있다. 서너시 둘러앉아서는 익살로 그런 공백을 메꾸어 보려는게 분명한데 그게 지정 저 낙엽에의 「센티」인 것을
빡스 로마나
「후리브르그」대학 곁에 그럴사한 「오피스」를 새로 마련한 「빡스 로마나」 본부로 사무국장 <콜도바> 박사를 찾았다.
가톨릭 국제기구로 제법 오랜 역사를 가진 탓도 있겠지만 여하튼 기자가 본 유사한 단체 중엔 그래도 제일 틀에 박힌 듯이 여겨진다. 여기서도 역시 돈타령을 하고 있는 것이 소젖(素情)을 털어 놓은 것 같아 오히려 친밀감이 가는 것이었다.
역시 각 부 책임자들과 5일간에 걸쳐 접촉을 가졌다. 그 제일 큰 것은 한국 「빡스 로마나」를 지원하기 위한 구체적인 방안을 준비중인 것을 본 것이며 기자는 책임있는 위치에서가 아니고 순전한 사견(私見)으로 한국의 현실에서 가령 「빡스 로마나」 한국지부같이 실질적인 원조(장학금 등)가 요청된다는 것을 역설했다.
어떻게 함으로써 강력한 유대를 가질 수 있고 심리적으로 고립감(孤立感)을 제거할 수 있다고 했다. 「빡스 로마나」가 오직 가톨릭대학생, 지성인을 망라(網羅)한 유일한 기관이라고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 조직이 견고하고 또 치밀한 지도원리(原理)를 족히 제시하고 있으며 각 지역에서 해마다 열고 있는 「세미날」은 적지 않은 성과를 걷우고 있음을 지적할 수 있다. 이런 뜻으로 한국과 같이 국제적인 긴요한 지원이 요청되고 있는 곳에서는 누구보다 앞서서 긴밀한 유대를 가져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여기서 전반적인 「구라파」에서의 유학생 관계에 언급해 봄직하다.
유학생 문제
첫째 현재 「구라파」에 와있는 한국유학생은 숫적으로 빈약하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허나 국내에서 본다면 유학 나가기가 그렇게 어려운데… 하겠지만 실은 먼저 온 분들의 귀국이 지나치게 늦은 이유를 들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거기에는 사정(事情)도 있고 사정(私情)도 있다.
어째뜬 적지 않은 한국유학생들이 도처에 있는 것이다. 학비와 다른 관계가 확실한 가톨릭 유학생을 제외하면 소수인들이 별고 없이 학업을 계속하고 있을뿐 기자가 만난 그 가운데 몇분을 통해서 사정(私情)을 살핀다면 첫째 계속 더 공부할 방책, 그러니까 정한 기간의 장학금은 만기로 끊어지고 중요한 학업을 끝맺지 못했기 때문에 한편으로 더 체류할 궁리와 귀국할 여비조차 막연하다고 한다. 여기 정부로서 아무런 대책조차 없으려니와 그러할 개인 기관도 없는 것이다. 때문에 허울좋은 유학생 이름을 쓰고 책은 고사하고 선문한장 사보는데 주머니를 털어야 하는 생활의 위협을 받고 있는 것이다. 이런 사정이 적지 않은 분들에게 적용되기 때문에 기자의 관심을 끌었다고 할 수 있다.
그들에게는 귀중한 연구가 있고 그보다 우리 현실을 개탄하는 티없는 정성이 있음을 값있게 사줘야 할 줄 안다.
이곳서 참으로 착실히 형설의 공을 쌓은 분과 이와는 반대로 밤낮 어디 기식할 곳을 찾기에 여념 없기만한 딱한 사정의 두갈래의 그런 층이 있음을 보고만 있겠는가 하는 생각이다. 오랜 유학생활을 통해서 알뜰한 가치의 세계와 우리의 장래를 위해서도 금덩이 같이 된 분들에게 나이 뒷 표현이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