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映畵(영화)와 倫理(윤리)]
발행일1960-11-06 [제253호, 4면]
영화는 다른 「메스 메리아」(=大衆傳達의 媒介)인 신문·「라듸오」·잡지와 마찬가지로 대중을 상대하는 큰 영향력을 가진 충분히 감각적(感覺的) 자극을 줄 수 있는 것이다. 영화관객(觀客)의 대부분은 본능과 자유의사에 여러가지로 영향을 받아 간혹 이에 도취(陶醉)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영향에 저항할 수 있는 단 하나의 수단이 있다. 즉 지적반성력(知的反省力)이다.
이 지적반성력은 불과 얼마의 사람만이 향유하는 특권이다. 일반대중 특히 저속한 비의식적 본능에 크게 감동되기 쉬운 청년들은 이상한 반응을 보인다.
시각에 비치는 화면(畵面=스크린)은 그것을 강조하는 음악·「제수추워」 대사(台詞) 또 「스크린」의 희황ㅊ판란한 것 등에 매력은 배가(倍加)된다.
사건은 하나의 꽉닫혀진 캄캄한 실내에서 행해지기 때문에 외부의 간섭 없이 관객들의 온 신경을 「스크린」에 집중시킨다.
영화의 매력은 대중들로부터 자기반성(自己反省)의 여유를 뺏어버린다.
한권의 악덕(惡德)한 영화는 제작자의 법률위반에만 그치지 않고 그 영향은 관객들에게 까지 미치는 것은 물론이다.
여기서 부도덕적이란 말을 생각해보자. 하나의 법률(自然法, 神法, 敎會法, 民法에 基因한 諸法律)을 범하는 것이다. 정치상 종교상의 권력을 모멸(侮蔑(하게하고 자살, 폭력, 살인, 절도가 부분적으로나 결과적으로 관객에게 긍정된다든지 반란, 거역, 증오(憎惡)가 교사(敎唆)된다면 그 영화는 비도덕적인 것이다. 엄밀한 의미에서 부도덕적이란 것은 정결의 계명 - 천주의 제6 제9 계명에 위반된 것으로 간주(看做)된다.
영화에서 받은 나븐 감화가 살인, 절도, 기타의 죄를 범하는 실마리가 되었고 성적충동(性的衝動)을 주었다든지 방종한 저항의식만을 자극하는데 영향했다면 그 영화는 『악의씨』를 뿌린 원인이 되는 것이다.
어린 소년이 탐정영화에 자극과 호기심을 얻어 은행을 털었다는 이야기가 그냥 우수운 이야기라고 받아 넘기기에는 너무나 경솔한 점이 있다.
영화는 신문, 「라듸오」와 같이 의도성(意圖性) 선동·선정성(煽動·煽情性)이 풍부한 것이며 이의 반복성(反復性)은 강요하는 무서운 힘을 가졌고 감정을 자극하는 시청각(視聽覺)을 움직일 수 있는 변천하는 화면 즉 색채 · 음악 · 효과는 상대적 비도덕적 영화가 될 수 있고 이것은 무서운 사회질서에의 파괴력(破壞力)을 지녔고 인간생활을 파탄의 구렁텅이로 빠뜨릴 수도 있는 것이다.
이와 반대로 영화는 그 지닌바 기능과 영향력이 인간감정을 순화(淳化)하고 올바르게 자아(自我)를 의식하게도 한다.
범죄나 악덕(惡德)이 관객의 동의(同意)를 얻는다면 그것은 비도덕적인 영화이다.
반면 관객으로 하여금 되려 반감을 가지게 하고 악덕에 대해 혐오(嫌惡)의 정을 품게 한다면 악을 피할 수 있는 강한 자극이 될 것이다.
선 교황 <비오> 11세께서 1936년 6월 29일 교회가 영화검렬을 도덕원칙에 따라 할 것을 명하셨고 <비오> 12세께서도 영화가 주는 영향력에 많은 관심을 가졌으며 세계 거의 여러교회가 「영화검렬」을 하며 제작된 영화마다 교우들이 볼 것인지, 아닌지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지, 아닌지를 심사발표한다.
많은 부도덕적인 영화가 인간을 죄에로 유혹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아직 교회가 임명설정한 심사위원회가 없다. 그리하여 「가톨릭時報」가 불충분하나 「영화안내」 란(欄)으로 외국심사위원회 발표 중 입수되는대로 발표하고 있다.
우리는 늘 깨어있어야 한다. 악과 타협할 수 없는 강경한 마음의 준비를 게일리 말아야 한다.
나 자신을 죄악의 희생으로 바친다는 것은 어리석다. 교회는 늘 주의를 환기할 필요가 있다. 일반 교우는 교회의 뜻을 받아 행동해야 한다.
영화를 보러가자. 그러나 집을 나가기 전에 먼저 보지말아야 할 것을 보러가지 않는지 다시 생각하자.
『나는 이 영화에서 무엇을 보고 배울 것이며 무엇은 미워해야 할 것인지』 마음의 준비를 갖추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