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解說(해설)] 戰後東獨(전후동독)의 오늘
新聞(신문)·自動車(자동차)들은 僅少(근소)
戰爭(전쟁) 痕跡(흔적) 아직 가시지 않아
가톨릭 · 프로테스탄트 合作(합작)이 特異(특이)
對蘇愛國心(대소애국심)이 宗敎(종교)와 代替(대체)되고
西獨存在(서독존재), 東獨人(동독인)의 唯一(유일)한 希望(희망)
西伯林(서백림)과의 對比(대비)가 頭痛(두통)
발행일1960-11-13 [제254호, 2면]
우리 일행은 「서 백림」정부의 공보처의 초대로 「베르린」의 「동서」를 구경하게 되었다. 우리가 차를 달리는 거리는 「영국」 「불란서」 「미국」의 지역을 얼는 얼는 지났다. 둔데군데 전쟁의 흔적이 눈에 띄인다. 파괴가 심한만큼 건설도 웅장하다. 「베르린」은 완전히 근대식으로 갱신되었다. 「한싸」광장의 중심에 「프로테스탄트」와 「가톨릭」의 두 교회가 근대식으로 신축되었었다. 불행히도 「가톨릭」성당이 신기(新奇)를 위해 신기하게 설계된 것이었고 그 안의 성상도 거의 추하게 보였다. 「수난」의 벽화에 그려진 군사들이 그대식으로 철모를 덮어쓰고 있었다. 「프로테스탄트」의 교회는 비록 근대식이었으나 밝고 아름다웠고 종탑도 영감적(靈感的)이었다.
「베르린」의 가톨릭 생활은 「유럽」 의 어느 지방에 비해서 강력하다. 평일 「미사」에도 진자들이 적극적으로 계응(啓應)으로 참예한다. 그리고 「프로테스탄트」칙이 전례가 없을만큼 합작하고 있다.
<되픠너> 추기경과 <디벨리우스> 감독 두분이 양편에서 같은 존경을 받고 있다. 「부란데부르그」 개선문을 지나면 「쏘련」 지역이다. 거리를 지나는 행인들이 머리를 숙이고 활기가 없다. 자동차의 수도 훨씬 적고 거리에서 파는 신문도 몇가지 못된다. 폭격으로 파괴된 건물의 철재편(鐵재片)이 아직도 쌓여있다. 「동(東)백림」의 영광인 「스탈린」광장도 획일(劃一)의 범주를 벗어나지 않는다. 가로수가 울창한 넓은 길을 걸어서 공원의 끝에 이르르면 「쏘련」군인의 군상(群像)조각이 높이 서서 내려다보는데 그 양편에는 「인민」이 해방자를 우러러 보는 군상이 조각되어 있다. 층대의 꼭대기에는 결과같은 둥근 건물이 있고 그 안에 붉은 별이 밝혀져 있다. 경외(敬畏)와 신심(信心)을 일으키려는 설계임에 아니 놀랄 수 없다. 또 그 안에는 성당 안처럼 경건하게 머리를 숙인 군상의 「모싸이크」가 양편에 있다. 그 주위에 놓인 꽃다발들은 공산주의자 교원들이 인솔하고 온 솩생들이 가져다 바친 것이었다. 이와같이 「동산주의자의 조국」인 「쏘련」에 대한 애국심을 앙양하여 종교와 바꾸려고 하는 것이다. 거리에는 「로시아」인의 은혜를 찬양하고 서방 「제국주의」를 멸시하는 새로운 「포스타」들이 붙어있다. 어디를 가나 모두가 동일성과 획일성 뿐이다. 「동 백림」의 공산당국은 「서백림」과의 비교문제가 두통거리이나 「동백림」 주민이 「서」편으로 건너가는 것을 막을 수가 없다. 「서백림」의 「마르크」가치가 「동」편에 비해 4대1임으로 「동」편 지역 노동자가 「서」편에 가서 노동을 하고 「서」편 주민은 「동」편으로 「오페라」구경을 간다.
이런 내왕은 4대국 협정 때문에 「베르린」 시내에 국한되었고 「동독」의 주민이 「독일 연방국」 안에 들어갈 수 없다. 그래도 「동독」의 피난민이 자유를 찾아 「서」쪽으로 들어오는 수가 적지 않다. 1953년에는 매일 평균 2천명이었으나 현재는 4-5백명이다. 탈출의 동기는 괴로운 경제 생활과 일상생활의 일체의 면에서 족재의 간섭이 귀찮기 때문이다. 「헌법」상으로는 종교의 자유가 있어 「동 백림」의 성당은 아직 문을 닫지 않았으나 개인생활면에서 압박이 날로 심하다. 그 「노동자의 낙원」에서 탈출하는 48%가 25세 이하의 청년들이다. 1958년에는 지성인, 의사, 교원, 농민, 수예직공의 탈출 수가 무척 불었다. 만일 「서독」 「서백림」이 없었던들 이네들의 희망이 어떻게 되었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