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반의향 / 천주계심을 믿지 않는 공산주의에 대한 경계심을 평화가장의 증가에 속아 이완(弛緩)시키지 말기를 위하여
「비엔나」회담에서 <케네디>대통령이 <후루시쵸프>로부터 배운 것은 역사의 흐름 속에 서 있는 인간성에 관하여 <케네디>의 관점과 <후루시쵸프>의 관점이 전적으로 반대적이며 상이(相異)하다는 것이다.
인간성에 관한 관점이 완전하게 반대되기 때문에 <케네디>는 공산주의와는 참다운 공존(共存)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을 명백하게 알았다.
또한 우리들이 반공산주의에 대하여 때때로 희미하게 생각해왔다는 것도 더욱 뚜렷한 사실이다.
인류의 역사는 이 세상의 종말에 다시 나타날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의해서 근본적으로 기록됐다.
그렇기 때문에 인류구제의 역사는 달나라나 「비너스」에 도달하기 위한 경쟁 역사와는 동일시 할 수 없다.
공산주의의 진정한 목표는 지구상에서 강대한 정치력을 장악하는 것이 아니라. 종교적 신앙으로서 천주와 굳게 결속되어 있는 모든 백성과 국가를 파괴하는 것이다.
공산주의의 목적은 단순히 보다 나은 사회상태를 위하여 투쟁하는 것이 아니라 인류 역사를 통하여 보드라도 그렇듯이 인류의 구원을 원하는 천주에 대항하여 강대하게 조직적으로 투쟁하는 것이다.
자유세계의 정치인은 경제와 물질적 성과를 위하여 공산주의에 양보하는 유혹에 쉽게 빠질 수 있다.
천주를 부인하는 공산주의 세력이 급진적이로 성장하고 있는 것이 서방 정치인의 크나큰 책임이라는 것도 사실이다.
<레닌>이 공산주의자 동료로서가 아니라 「독일」장군 <루덴도프>로서 제정 「로시아」의 「짜알」왕조를 전복시키기 위하여 「로시아」에 미사(密使)를 보낸 사실을 누구라도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얄타」회담시에 앞을 내다본 영국의 <쳐칠> 전 수상의 의견과 대립된 <루즈벨트> 전 미국대통령은 <스타린>에 양보함으로써 공산주의가 자유로히 만연될 수 있는 길을 마련하였었다.
공산주의와 싸우는 데 있어서 정치인의 지상 원측은 단지 경제나 혹은 순수한 정치적 고려에만 억매일 수 없다는 것이다.
공산주의와 투쟁하고자 원하는 모든 정치인은 천주에 복종하고 도덕 법측을 준수하고 인류가 종국에는 천주에 의해서 구원된다는 것을 아는 가운데 투쟁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러한 관점으로만 이 참다운 평화가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
■ 전교의향 / 복음의 전달과 교리를 통하여 이교(異敎) 국가에 올바른 사회 질서를 확립하기를 위하여
모든 사회 관계를 조절하기 위하여 천주께서 인간 사회에 마련한 모든 법을 사람들이 인정하고 준수할 때만이 사회질서가 오래도록 유지될 것이라는 것이 그리스도교의 경험인 것이다.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는 고대 비그리스도교문화도 또한 자연법의 일반원측에 따랐다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오늘날 많은 사회적 변화가 진해오디고 있는 대부분의 국가에서는 자연법의 일반원칙이 단순한 물질적인 획득으로 인하여 포기된 것 같이 보인다.
과격한 국가주의를 지향하는 나라에서는 인접국가와의 제반관계가 관습법(慣習法)에 따라 조정되지 못하고 있고 몇몇 국가 지도자들은 사회적 경제적 위치를 개선할 욕심으로 독재적인 수단을 취하는데 서슴치 않고 있다.
그들은 개인과 가정의 기본 권리를 경시(輕視)하고 있다.
그들이 비록 공산주의를 거부한다 하드라도 그들의 방법 때문에 공산주의에게 길을 마련해주고 있다.
그들은 어느 새로운 사회질서보다도 존중되어야 하는 영구한 자연법칙을 인정하는데 소홀하다.
진리를 권유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달하는 것이 교회의 과업이다.
교회의 가르침은 자연질서를 포함하고 있고 초자연적인 천주의 사라으이 수준까지 그것을 끌어 올린다.
사회질서는 천주와 인간의 사랑으로부터 유발(誘發)된다.
그러나 교회의 과업이 구체적 사회체계나 경제체계를 세우는 것은 아니다. 교회의 사회교의(社會敎義)는 여하한 사회질서도 그 위에 기반을 두어야 하는 도덕적 종교적 원칙의 설명인 것이다.
사회 안에서 사회원칙의 구체적 적응과 해결을 찾는 것이 신부의 인도를 받는 평신도의 과업일 것이다.
서울교구장 <바오로> 노(盧基南) 주교께서는 일전에 우리 한국 가톨릭 신자들이 사회문제에 있어서 너무나 태만하다고 비판하였다. <노> 주교님은 『좋은 의미로 혹자는 한국 가톨릭 신자들이 사회문제에 너무 무관심하다고 비난하고 있다. 사실상 영세 받은 한국 교우라면 자기 개인의 구령보다 주위 사람들의 구령에 더 힘써야 할 것이다. 오늘날 육신과 영혼이 분리된 경향이 아직도 존재하고 있다』라고 말하였다. 선교황 <비오>12세께서는 교회의 사회교의는 그 중요성에 있어서 신학과 철학 다음으로 중요하다고 언급하신 적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의 사회 가르침을 철저히 하기 위하여 무엇보다도 먼저 모든 신학생들이 교황의 사회회칙(回勅)을 연구할 기회를 많이 가질 것이다.
또한 사회질서에 대하여 책임이 부여된 모든 국민에게 사회정의(社會正義)의 제원칙을 지도할 수 있는 훈련된 신부와 평신도를 위한 사회기구(機構)와 「센터」를 설치해야 할 것이다.
신자나 미신자를 막론하고 올바른 사회질서를 알고 지키게 하는 의미로서 「라디오」와 신문이 널리 사용되어야 한다. 영구적인 사회를 구성하기 위하여 교회 내의 모든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교회에 의해서 가르쳐진 정의와 사랑의 원칙을 그들의 생활 속에 주입시키고 실현시키는 참다운 사회질서의 기틀을 마련하는 데에 책임이 부여되어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