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史(사)를 만든 사람] (8) 교황 <레오> 13세(原名=Vincenzo Gioacchino I'ecci)
발행일1961-07-23 [제288호, 2면]
■ 생애
1810년 3월2일 「이태리」의 「까르삐네또」의 청빈한 농촌귀족의 아들로 출생.
「로오마」 신학교와 「로오마」 귀족 학원에서 열학. 1837년에 신품을 받고 교황 사실(私室) 고위성직자로 승진.
1838년에 「베니삔뜨」의 총독으로 임명되어 그곳에서 도적(盜賊)을 토벌하고 후에 「스포레트」와 「페루샤」의 총독이 되었다. 1843년에 「베루가」 주재 교황대사를 역임. 선교황 <그레고리오> 16세에 의해서 추기경 및 「페르샤」주교로 임명되었다.
그 후 반교회적 「이태리」 법률에 대항하여 용감히 투쟁했다.
1876년 교황청 회계원장으로 임명되고 1878년 2월20일 교황으로 선출되어 동년 3월3일 등극.
1903년 7월20일 「로오마」에서 서거(1924년 「미라노」 대성당에 안치)
■ 업적
<레오> 13세는 여러 선교황들이 시대의 오류(誤謬)를 주로 교회와 근대문화의 발달을 조화시킨다는 태도로서 단순하게 넘겨버린 것을 적극적으로 반대하였다. 교회와 근대문화와를 접근시키기 위하여 교회의 문화상의 의의(意義)와 근대사회의 결함에 대하여 교회가 가지고 있는 치료능력을 명백히 하였다.
위대한 여러 회칙(回勅), 1881년의 「디우뚜르눔 일루드」(시민권리의 기원(起源)에 관한 _ 1888년의 「리베르따스」(시민의 자유에 관한 것) 1890년의 「사피엔시에 크리스티아네」(국민의 의무에 관한 것) 및 1901년의 「그라베스데 꼼무니」(그리스도교적 민주주의에 관한 것) 등에서 <레오> 13세는 성 <토마스 아퀴나스>의 정신에 따라서 그리스도교적 국가이론을 고전적(古典的)으로 전개(展開)하였다.
또한 민권(民權)을 옹호하고 적도(適度)의 민주주의는 가톨릭 교설(敎說)과 일치하는 것이라고 강조하였다.
특히 <레오> 13세는 사회문제에 관하여 최대의 관심을 기울여 이것이 현대의 문제의 촛점이라고 하였다.
1891년에 가장 중요하고 의미심장한 회칙 「레룸 노바룸」을 반포하여 사회주의와 자유주의에 대한 반대의 선봉에 서고 아울러 유기적(有機的)인 그리스도교적 사회관에서 추발하여 ___ ____ 소유(所有)와 노동, 인간과 경제, 상호(相互)를 정당한 관계로 놓고 또한 노동의 가치와 고귀성(高貴性)을 역설하여 노동자 문제의 취급에 지도적 영향을 주고 국가에 의한 사회정책에 대해서도 주앧한 의의를 인정하였다.
또한 <레오> 13세는 과학과 예술의 장래에 크게 공적을 남기고 철학과 신학에 있어서는 성 <토마스 아퀴나스>가 지도자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 하여 성 <토마스>를 그리스도교 학교의 보호성인으로 정하였다.
■ 개성
어린애와 같이 경건(敬虔)하고 게다가 외교적으로 총명하며 약한 육체에 천재적 총명을 지니고 철학적으로 신학적으로 높은 교양을 겸비한 「라띤」어의 시인(詩人)이며 그리스도교의 사회철학과 국가이론에 관하여는 고전(古典)이라고 할 수 있는 선구자인 <레오> 13세는 교회와 교황권(敎皇權)을 다시 한 번 최고의 도덕적 위용(威容)에까지 높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