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과 우리 民族(민족) 護敎(호교) (끝)
발행일1961-07-23 [제288호, 4면]
그러면 중세기 가톨릭에 부패한 사실은 인정하는가? 어느 정도까지는 인정합니다. 이것을 잘 알아듣기 위하여 이야기를 하나 하겠읍니다.
전에 만주 오지(奧地)에 큰 가톨릭 촌락이 하나 있었읍니다. 중앙에는 성당이 있고, 신부가 있고, 초등학교도 있었읍니다. 그때는 지금 비적 같은 마적(馬賊)들이 횡행하여 약탈해우이가 심하였읍니다. 마직의 습격 위험을 눈치채고 보발군을 띠워 50리나 60리 밖에 있는 경찰에나 관군(官軍)에게 보호를 청하면 말로는 응락하면서도 실제로는 도와주지는 않았읍니다. 마적떼와 싸우다가 주기는 싫었던 연고입니다.
그래서 그 촌락에서는 동리 청년들을 무장훈련 시켰읍니다. 소총은 물론 경기관총을 두 대나 장만하였읍니다. 그 뒤로는 마적의 습격을 받지 않았읍니다. 그 중앙에 있는 신부는 종교면으로는 사제요, 행정면에는 동리 행정장관이요, 군사면에서도 군사령관이었읍니다. 주위 환경의 절박한 요구에 의하여 자연히 이렇게 되었던 것입니다. 말하자면 종교와 정치가 일체로 결합되이 있던 것입니다.
이 중세기 전반기로 눈을 돌이켜 봅시다. 기존 「로오마」 제국의 질서는 무너지면서 자연민족의 침입으로 인하여 사방이 소란스러웠읍니다. 이때 지방 주민들의 요구에 의하여 지도자로 나선 인물들이 신부들이요 주교들이었읍니다. 그 후 점차로 자연민족들도 가톨릭에 입선하고 왕공들도 신자가 되였읍니다. 그때 형편으로는 종교회의에는 왕공(王公)들도 나와야 하고, 행정회의에는 주교들도 나가 앉아야만 일이 되었읍니다.
그 시대 형편이 이렇게 하기를 요구하였던 것입니다. 어느 주교좌에 주교가 죽으면 왕공들이 추천하는 신부가 주교로 축성되었읍니다. 이래서 성직봉행에 적임자 보다도 왕공의 눈에 든 신부들이 주교되는 수가 많아지다가 드디어 이것이 한 제도가 되었읍니다. 그 때 주교라면 세력도 많고 교회재산도 많았읍니다. 정치와 종교가 이처럼 일체로 결합하여 천여 년이란 세월이 흘렀읍니다. 그들도 사람들인지라 어찌 부패되지 않겠읍니까.
그렇다고 해서 부패된 교역자들의 수효가 더 많았다는 것은 아닙니다. 지금 미국에 가톨릭 신부는 약 5만5천명 쯤 될겝니다. 그 중 「워싱톤」이나 「뉴욕」같은 들어난 도회지에 있는 신부나 주교를 합하여 2천명만 바람을 피워도 미국 가톨릭은 부패하였다는 누명을 벗을 길은 없을 것입니다. 중세기 가톨릭은 그러하였읍니다.
중세기 교직자들이 그처럼 부패하였다고 하여 여러분이 상상할 수 없으리 만큼 괴상망측한 행동을 한 것은 아닙니다. 같은 비행이라도 보통 시민이 그랬다면 별문제 없지만, 목사님이 그랬다면 문제는 더 커지고, 신부가 그랬다면 더 시끄러워지고, 주교가 그랬다면 문제는 더욱 중대화될 것이 아니겠읍니까. 중세기도 그렇던 것입니다. 솔직이 말해서 중세기 가톨릭 교역자 중 부패한 교역자들이 있었지만 자유당 시대 우리 교관들 보다 더 부패한 것은 없었읍니다.
그러면 <루터> 당시 가톨릭이 「면죄부」(免罪符)를 팔아먹었다는 것은 사실인가? 이것을 설명하자면 장황한 교리설명이 앞서야 되겠는데 지금 여기서 그렇게 할 시간의 여유는 없읍니다. 그와 비슷한 예를 들자면 어떤 나라에든지 무슨 법을 범하는 자는 3년 징역이나 30만환 벌금에 처한다는 따위의 법문이 있을겝니다.
이런 경우 30만환 벌금을 내고서 복역을 면했다면, 그 나라 정부는 돈벌기에 눈이 뒤집혀 범인으로부터 뇌물을 받아들이고 범인을 그대로 석방했다고 해석한다면 그것이 과연 타당한 해석이라 하겠읍니까?
가톨릭은 팔방미인은 아닙니다. 모든 문제에 확고한 원칙이 서있읍니다. 따라서 적이 많습니다. 그래서 중상모략도 많이 당합니다. 고로 여러분 중에도 가톨릭에 관한 것을 알아보려면 직접 가톨릭 자에게 물어볼 것이지, 가톨릭의 적들에게 가서 문의할 것은 아닙니다.
위에 말한 중세기 가톨릭의 부패라는 것도 벌써 4백여 년 전 옛날 이야기입니다. 고로 그것을 둘이서 현금의 가톨릭을 평하려는 것은, 여러분의 요람시대의 짓을 가지고 지금 바로 여러분이 그러하다고 평하려는 것 같은 오류도 심한 것입니다.
중세기가 끝나면서 속권에서 완전히 분리한 가톨릭은 그 고질이던 반신불수증에서 시원스럽게 해방되었읍니다. 이 반신불수증의 근원이 바로 속권 그것이었읍니다. 이렇게 완전히 건강을 회보한 가히 건강을 회보한 가톨릭은 나는 듯한 가벼운 걸음으로 자기 행진을 계속하여 나가고 있읍니다.
이상과 같은 내용 즉 천주·영혼불멸, 천당과 지옥·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교회, 그 교회의 지상 통치자로서의 교황 등을 가톨릭이 확신하면서 주장하고 있는 것은 철학이나 자연화학이나 사학 등의 『무식한 소치』로 인한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그 증거로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생각하여 보십시요. 우리 나라의 문화 정도만 하여도 이 서울시에 2백50만 가량의 시민이 모여 산다면 거기는 있을 만한 학자는 다 있읍니다. 상당한 철학자, 상당한 자연과학자, 상당한 사학자 등…… 그런데 5억4천만 가량의 가톨릭 신도 대부분은 우리 보다 문화 정도가 훨씬 높은 구라파와 아메리카에 살고 있읍니다. 고로 그 속에는 세계적으로 고명한 철학자며, 자연과학자며, 사학자 등이 허다할 것은 자연지세가 아니겠읍니까?
과학과 종교가 배치된다는 말은 지난 19세기 중 일부에 떠돌았지만, 19세기의 자연과학계가 그렇던 것은 아니었읍니다. 불란서 <에이미외>씨는 그 실상을 연구한 다음 당시 고명한 자연과학자 1백38명 중 무돈착자가 8명, 무신론자가 5명, 그리고 나머지 1백20명은 신앙을 가졌던 사실을 밝혀냈읍니다 .
혹시 여러분 중에는 가톨릭이 과학의 발달을 미워하여 <갈릴레오>같은 과학자를 박해하였다고 믿고있는 분이 아직도 계신다면 그때의 진상을 자세히 모르고 계신 것입니다. <갈릴레오> 보다도 먼저 <고빼르닉> 신부와 <니콜라오.쿠사> 추기경 등이 지동설을 주장하였지만 아무런 문제도 일어나지 않았읍니다. <갈릴레오> 때에는 독일에 「프로테스탄」의 지반이 세워진 다음이었읍니다. 「프로테스탄티슴」은 성서자유 해석을 원리로 하고 있는 것은 여러분이 잘 아시는 바입니다. 그때 「이태리」에서는 천문학자들이 지동설파와 천동설파로 갈려져 있고 또 제각기 성서를 자기 편으로 끌어가려고 애썼읍니다.
그러므로 교황청에서는 우선 분쟁을 진압하기 위하여 침묵을 명하였고, 10여 년 지난 다음에는 지동설을 주장하는 <갈릴레오>의 저서를 출판할 것을 허락하되 지동설을 한 가지 「가설」(假設)로 제시할 것, 그리고 천동설을 오류라고 단정하지 말 것이며 논적들을 맹격하지 말 것이라는 조건부로 출판인가를 내렸던 것입니다. 그런데 <갈릴레오>는 자기 저서를 출판하였는데 이상 두 가지 조건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에 논쟁은 다시 격심하여지고 드디어 법정에 소환되었읍니다. 그 결과로는 『배신행위』 때문에 얼마동안 연금되어 있다가 자유의 몸이 되어 고향에 돌아가 연구를 계속하다가 우연히 실명하였던 것입니다.
<갈릴레오>가 재판을 받다가 발로 땅을 굴르면서 『그래도 땅은 돌고있다』고 말했다는 것은 18세기 말업에나 생겨난 낭설에 불과합니다. 사실 재판 당시 법관들의 질문에 <갈릴레오>는 지구가 돈다는 증명을 대지 못하였읍니다. 지금 과학자들은 그때의 <갈릴레오> 논거는 지동설의 증명이 될 수 없음을 인정하고 있읍니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인 그로서, 더구나 과학적 증명을 제시하지 못한 그로서 고등성직자들 앞에서 그처럼 무례하고 당돌한 행동을 하였을 리는 만무합니다.
그 후에도 교황은 그의 연구를 도와주고저 하여 매년 연금을 지급하였고, 그가 죽을 때에는 교황강복까지 내렸던 것입니다.
이상과 같은 내용 즉 천주·영혼불멸, 천당과 지옥,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교회 등을 가톨릭이 주장하는 것은 「밥벌이」 삼아서 하는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그 증명으로는 가톨릭의 순교자들을 생각하여 보십시요. 지난 세기 우리 나라에서도 남녀노소 약 1만명의 순교자들이 났읍니다만 저들은 『안 믿겠소』란 말 한 마디면 곧 석방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말을 아니하고서 악형 중 참살을 감수하였던 것입니다. 가톨릭 창립 이래 오늘까지 이런 순교자들은 몇 백만명이나 되는지 그 수효를 알 수도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가톨릭 신부라 하면 그 지식은 대학졸업 정도 이상이고 또 독신생활로 죽을 때까지 일관하고 나가는 것은 여러분이 잘 알고 계신 사실입니다. 이미 땅속에 파묻힌 성직자는 그만 두고 지금 지구상에서 숨쉬고 살아있는 이런 성직자들의 수효는 50만명에 육박하고 있읍니다. 이밖에 현세의 쾌락을 일축하고 엄격한 규칙 밑에서 역시 독신생활로 일관하는 남녀 수도자는 현금 지구상에 살아있는 자들만 하여도 2백만명에 육박하고 있읍니다. 가톨릭의 이런 성직자들과 남녀수도자들을 합하면 거의 이 서울시민의 수효만 합니다.
구령을 목표로 하는 이러한 가토릭이 인류사회에 어떠한 영향을 끼쳤는지 이제 회고하여 봅시다.
중세기 전반기에 자연민족의 침입으로 인하여 사방이 소란하던 저 시대에도 가톨릭 수도자들은 교회의 문헌 뿐 아니라 「로오마」와 「그리시」 학자들의 저서를 손으로 베껴 후대에 전하였고, 중세기 후반기로 들어서 질서가 잡히기 시작하던 11세기부터는 도처 수도회에서 농사, 개간, 산림, 축산 등을 연구하여 주민들을 지도하여 왔고, 각처에 학교를 세워 학문을 장려하였읍니다. 그래서 중세기 말엽까지 가톨릭의 직접간접의 주선으로 세워진 대학이 약 70개소나 되었읍니다.
오늘에도 유명한 저 「옥스포드」 대학, 「켐프리치」 대학, 「빠리대학」 등의 기원도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런 대학에서는 실학 뿐 아니라 철학, 의학, 수학, 천문학, 문학도 가르쳤던 것입니다. 현대 건축이나 미술이나 음악의 근간도 저 시대에 이루어진 것은 여러분도 아시는 바입니다. 그리고 물리학, 화학, 박물학 등 자연과학의 연구도 그때 시작되었읍니다.
역사를 회고하면 인도나 「아라비아」같은 지방에도 일시는 문화가 꽃피었으나 그후 쇠퇴하고 말았는데 그것은 그 문화를 뒷받침하던 왕조가 몰락한 까닭이었읍니다. 그런데 중세기에 싹튼 현대의 문화는 그동안 「유롭」의 여러 왕조가 일어나고 몰락하고 하기를 거듭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일로증진하여 오늘에 이른 것은 그 뒷받침이 되던 가톨릭만은 엄연히 서있어 온 연고입니다. 그래서 지난 세기 영국의 탁월한 지식인이요 고명한 정치가이던 <클라스톤>은 비록 영국감독교 신자이였지만 역사를 연구하고서 결론짓기를 초대 3세기 동안의 박해가 끝난다음 「로오마」 가톨릭은 1천5백년 동안 인류의 앞장서서 이 세상 문명을 지도하면서 끌고나왔다고 증언하였읍니다.
이러한 가톨릭이 윤리와 사상면에도 위대한 영향을 끼친 것도 역사적 사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당시 「로오마」시에는 자유민 보다 노예수효가 20여 배나 많았읍니다. 그때의 노예는 물건취급을 받고 있었으니 상전은 그들의 생살대권을 잡고 있었으며, 노예에게는 결혼도 금지되어 있었고, 우연한 야합으로 자녀를 낳으면 그것은 가축의 새끼처럼 상전의 소유에 속하고 말았읍니다.
가정에 있어서도 그러하였읍니다. 아내는 장부의 노예 비슷하였읍니다. 장부는 아내의 생살대권을 잡고 있었고 자녀에 대하여도 아버지는 생살대권을 잡고 있었읍니다. 그리고 아버지 앞에선 어머니와 그 자녀의 관계는 자매관계 내지 친척관계 비슷하였을 뿐이었읍니다.
이런 뿌리 깊은 전통을 근본적으로 혁신시킨 것이 가톨릭이었읍니다. 사람은 다 동일하신 천주의 자녀이며, 아내는 장부의 동무이요, 자녀는 부모의 소유물이 아니다. 천주의 모상을 가진 그 영혼은 천주께서 직접 창조하여 주셨으며 임시로 부모에게 맡기신 것에 불과한 고로 부모는 천주의 심판대전에 그들을 잘 교육할 책임을 지고 있는 것이라고 강조하였읍니다.
그리하여 노예제도가 완화 내지 폐지되고, 아내의 위치가 향상되었으며 혼인의 순결성이 확보되어 중혼, 이혼, 축첩이 금지되고, 부녀자의 약탈, 유아살해, 낙태 등이 범죄로 규정되었읍니다. 잔인한 형벌제도가 완화되고, 사사로운 원수갚음은 금지되었읍니다. 강자의 책임을 강화하고 고아와 과부같은 약자들의 권리와 보호를 강력히 주장하였읍니다. 교회는 교회법상으로만 이상의 내용을 주장하였을 뿐 아니라, 국법에도 그대로 실현되도록 줄기찬 작용을 계속한 결과로 현대 모든 문명국의 법전 속에까지 그 정신이 살아오게 되었읍니다.
그러므로 불란서 빠리대학 법과교수 <에밀셰농>씨는 가톨릭과 세계문화의 관계를 30년 동안이나 엄밀히 연구한 다음 서양 정신문화 가운데 장점(長點)과 미점(美點)은 가톨릭이 그것을 산출하였고 또 육성하였다는 결론을 내렸읍니다.
이런 위대한 교화력을 지니고 있는 가톨릭이 본격적으로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은 18세기 말입니다.
서기 1777년 권월신, 정약전, 정약용, 이덕조 같은 당대 1류 지식인들이 한 자리에 모여 연구회를 열고 우주관이며 일생관 같은 문제를 내걸고 진지한 태도로 검토하여 보았읍니다만, 이 우주는 어떻게 된 것이며, 인생은 어떻게 생겨났고 또 무슨 목적으로 사는 것인지 알아낼 길이 없었읍니다. 불교서적이며 유교서적이며 도교서적들을 들추어 보아도 그냥 오리무중이었읍니다. 끝으로 그들은 『천주실의』란 책을 읽어보고서 확연히 깨달았읍니다. 그 책의 내용은 아까 말한 가톨릭의 대강령 그것이었읍니다. 그들은 크게 만족하여 이승훈씨를 중국 북경에로 보내었읍니다.
그는 북경에 가서 가톨릭을 연구하여 영세입교하고 자기 친구들의 소청대로 천주교서적을 많이 가지고 귀국하였읍니다. 그들은 곧 연구를 시작하였고 또 계속하였읍니다. 그리고는 세례를 받고 신앙생활을 시작하엿을 뿐 아니라 동포에게 전교를 하여 1794년 중국인 주문모 신부가 한국에 들어와 보니 가톨릭 신도는 이미 4천명에 달하고 있었읍니다. 이렇게 전도사의 파견도 없이 손수 가톨릭을 들여와서 전교한 사실은 다른 역사에서 볼 수 없는 신기한 사실로서 우리 민족은 가톨릭을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가 잘 되어있음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호사다마인지라. 1801년, 1839년, 1846, 1866년 등의 대 박해를 당하였고, 남녀노소 약 1만명의 순교자들을 내었읍니다. 이 마지막 박해의 장본인 <흥선>대원군이 처음에는 가톨릭과 악수할까 하고 망서리다가 금전직하로 돌변하여 대 박해를 감행하였던 것입니다. 만일 그때 가톨릭을 받아들이고 동시에 서양문물을 이용하였더라면 우리나라 문명은 일본을 앞섰을 것이고, 저 일로전쟁이니, 일청전쟁이니, 따라서 한일합병이니 하는 것도 없었을 것이고 저 38선도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나라는 동양에서 제일의 문명국이 되었을 것입니다. 동시에 가톨릭 신앙도 이 땅에 흠뻑 보급되었을 것이고 따라서 정치 경제면의 부패가 저런 정도에까지 이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부패를 막는 것은 양심입니다. 양심도 우리가 타고난 생태적입니다만 이것만으로는 저 강렬한 물욕, 성욕, 권리욕, 명예욕 등을 거스려 싸우는데는 너무나 무기력합니다. 이 양심을 제일 강력하게 뒷받침하는 것이 가톨릭 신앙입니다. 아까 말하기를 가톨릭 순교자들은 믿지 않겠다는 말 한 마디만 하면 곧 자유의 몸으로 방면되었겠지만 잔인무쌍한 형벌을 감수하고 마침내 생명을 흔연히 희생하였다고 하였읍니다. 그들에게 배교를 강요하지 않고, 저 건너 어떤 여자를 겁탈하고 오지 않으면 죽이겠다든가, 아무 곳에 가서 살인강도를 하지 않으면 죽이겠다든가 하고 협박강요할 지라도 그들은 역시 혹형과 살해를 감수한 것이지 결코 그런 죄악을 범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것이 가톨릭 신앙의 힘입니다. 이런 정신이 우리 민족에게 필요치 않겠읍니까?
나라가 잘 되려면 기차, 기선, 자동차, 비행기, 군함, 대포, 「탱크」 등 이런 물질문명의 이기들만 많이 있으면 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무엇보다도 건전한 정신의 원리가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 민족을 지도할 이런 정신의 원리는 어디 있읍니까?
이미 고인이 되었읍니다만 사학자 육당 최남선(六堂 崔南善) 선생은 이것을 알아보고 다음과 같은 요지의 말을 하였던 것입니다.
즉 서양의 근대문화는 단순한 물질과 이욕 위에 설립된 것이 아니라 그 속에는 실로 근 2천년의 역사를 가진 가톨릭의 위대한 교화력의 기반이 들어있는 것을 알아야 한다. 저 지나의 유교급 도교정신과 인도의 「과라문」급 「니르반」 정신에서 근대문화가 산출되지 못한 것도 알아야 한다. 종교는 개인의 구령은 물론이요 경우에 따라서는 민족까지를 구제하는 정신적 지주(支柱)가 되주어야 하는데, 우리 민족에게 이런 역할을 해줄 것은 그 무엇인가?
유교를 그것이라고 할까. 불교를 그것이라고 할까. 「프로테스탄」을 그것이라고 할까. <칸트>를 데려 올까. <맑스>나 <레닌>을 불러올까? 모두 아니다. 근 2천년 동안 인류의 정신상 대지주(大支柱)로서 유혈의 대 박해 문에 부흥 종교개혁 산업혁명 과학발흥 등 온갖 풍파에도 동요를 보이지 않고 대반석 위에 우뚝 서 있는 위대한 가톨릭이 있지 않느냐. 우리 민족의 장래를 맡길 곳은 가톨릭 뿐이라고 갈파하였는데 과연 지당한 견해입니다.
과연 그렇습니다. 가톨릭은 요새 생겨난 이론이나 설계가 아닙니다. 이미 실험되고 증명된 사실의 체계입니다.
아까 <에밀.제농>씨의 말과 같이 현대 정신문화의 장점과 미점을 산출했고 육성할 것이 가톨릭이라는 것은 역사적으로 입증되는 것입니다. 우리 민족의 현실은 물질보다는 정신의 지주를 필요로 합니다.
민족해방 이후, 특히 6.25 동란 이후 가톨릭에 대한 지식인들의 관심이 날로 깊어지는 동서 영세입교자가 격증하고 있읍니다. 작년 1년 동안에는 약 5만명이 영세입교 하였고 현금 영세예비자는 10만명으로 추산됩니다. 특히 지식인들의 입교가 많아지고 있는 것은 세계의 의목을 끌고 있는 우리의 자랑으로서 한국 가톨릭 자체로서는 물론이요 우리 민족의 좋은 장래를 약속하는 훌륭한 징조라고 보는 바입니다. 이만 그칩니다. <끝>
(=필자 경향신문 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