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포] 서울 中林洞(중림동)
「레지오」단원이 본당일 全擔(전담)
치명자 나신 곳
역사를 지닌 본당
발행일1960-11-20 [제255호, 3면]
서울역 위의 염천교 다리를 지나 지저분한 시장을 거쳐 가노라면 언덕 위에 뾰죽한 종각이 보이는 빨간 벽돌집이 우뚝 솟아있다. 이 성당은 한국에서 최초로 건립된 역사 긴 본당이다.
처음엔 즉 1888년에 서대문에 있는 외수레골에다 조그마한 강당을 설립하여 거기에 최초로 약현동 교우들이 모여 같이 기구하며 여러가지 일을 보고 있었다.
그후 1892년에 불란서 <가밀로> 丁(P. C. Doucet) 신부가 최초로 이곳에 부임하여 김(金君善)씨의 소유지인 합동(蛤洞)산전 50여평을 마련하고 즉시 공사에 착수하여 동년 9월 25일에 준공하여 <민> 대주교의 집전으로 동성당 축성식이 거행되었었다. 동성당의 주보는 「대성요셉」성인이다.
제2대로 1917년 5월에 <우>(禹=Paulus Villemot) 신부가 부임하여 즉시 가명 보통학교 남·녀교사(校舍)를 벽돌로 신축하였다. 동가명소학교는 처음 1906년에 가명학교를 설립하였다가 1923년 동가명학교 남·녀별로 구분하였던 것을 병합하고 사립사명하굑로 하였다가 1925년에 가명 보통학교로 승격하였다.
1926년 3월에 <우> 신부가 부감목겸 종현본당 신부로 전임하여 그 후임으로 <요셉> 김(金充根) 신부가 부임하였다. 다음으로 1943년 <바오로> 이(李善用) 신부가 제4대, 1946년엔 현 서울교구 부감목 <바오로> 신(申仁植) 신부가 맡아 보았고 1954년부터 현재까지는 <발라바> 김(金哲珪) 신부가 교육(敎牧)을 맡아왔다.
동 중림동성당의 발전을 위해서는 1대, 2대, 3대 신부의 부단의 노력과 가명학교 교장 박영조(永祚) 교장의 헌신적 노력이 컸다고 본다. 이 성당은 본래 군란때부터 있었기 때문에 군란때 어려움을 무릅쓰고 중국과 왕래하며 한국교회에 이바지한 회장도 있는가하면 포졸들에게 잡혀가서 거룩한 치명자가 된 이들도 많이 배출한 곳이다.
그리고 교회활동으로는 1920년 동본당 방조기관으로 동지회가 창립되었다가 1922년 청년회로 변경 발족하였다. 이는 주로 성경 연구와 외교인 귀화에 전력했고 초상관리도 열심히 하였다 한다.
1910년 8월 25일 교우유지 <요셉> 김(金順之)씨 외 6명이 발기로 보신계(保信계)를 설정하고 발전하여 오다가 1928년 8월 25일 계원 전원의 독지로 동계를 인계받아 총면적 8,900평이나 되는 땅을 교우 공동묘지로 구입하였다 한다. 그것이 현 잠실리이다. 현재 6개의 「쁘레시디움」과 학생회와 주일학교가 있다.
「쁘레시디움」 중 「자비의 모후」 쁘레시디움은 주로 남자 노인들로 이루고 있는데 교적 정리 가정방문 또는 전교일에 힘쓰고 있다. 그리고 동년배의 혼성으로 된 「착한 의견의 모친」은 주로 초상관리와 냉담자를 이끌어 주며 병자를 방문하고 대세도 노아주는 등 많은 활약을 하고 있다. 다음으로 「치명자의 모후」는 주로 남자 청년으로 구성되고 있고 「정결하신 모친」은 주로 여자 대학생으로 구성되고 있으며 성가를 맡아보고 있다.
다음에 중고등학생으로 남·녀 혼합된 「의덕의 거울」이 있고 소년만으로는 「성실하신 정녀」가 있다.
중고등반 학생들은 학생운동과 교리공부에 힘쓰고 있다.
다음 주일학교도 학년별로 구분되어 가명유치원 수녀들이 활약하고 있다. 6·25동란 후 신자 수는 굉장히 늘었으나 이 본당에서 서대문과 아현동으로 갈라주고도 아직도 5천9백45명이라는 노랄운 숫자를 부여주고 있다. (현재 동 성당의 건평은 1백2십평밖에 안되어 주일이면 많은 불편을 느낀다고 한다) 회장단을 보면 총회장 <벨라도>(朴大英)씨와 상무회장 <바오로>(文相玉) 회장이 있고 구역회장이 50이 있다고 하며 그밑에서 동 회장을 돕는 총대가 8명 있다고 한다. 이들은 주로 가정방문을 하여 교우들의 실태를 엿보고 서로 친목을 도모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