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포] (76) 慶南(경남) 密陽(밀양)본당
惰性은 가셨고
平日미사 만과 때도 성당은 비좁아
발행일1961-08-06 [제289호, 3면]
『내가 이 지방에 온 이후 표방하는 전교방식은 신자들에게 교회의 예식(禮式)을 잘 가르쳐 예전(禮典)을 통하여 신앙심을 앙양하고 깊게하도록 하자는 것이며 또 아동들에 대한 종교교육은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이므로 이에 치중하고 있는 것입니다』
밀양본당 신부로 부임하여 1년7개월이 되는 <비오> 함(咸英相) 신부는 기자에게 이같이 그 사목(司牧)의 방향을 말하는 것이었다.
「아랑」(阿娘)의 전설과 「영남루」(嶺南樓)로서 알려진 옛 읍내(古邑) 밀양은 현재 읍내의 인구 약 4만을 헤이는 아담한 고장이다. 경부선(京釜線) 밀양역에서 하차(下車)하여 「합승」(合乘)이나 「뻐스」로 약 10분이면 읍내에 도착되는데 다시 시내 중심지에서 서북(西北)으로 1「키로」 지점에 자리잡고 있는 성당 건물은 붉은 벽돌로 된 구식(舊式) 모양이지만 중공군(中共軍)의 침략으로 인한 1.4후퇴 이후 서울이 수복될 때까지 서울 소신학교(小神學校)가 한 때는 이곳에서 피난사리를 하였던 곳으로서 사제관 복자회 수녀원분원 유치원 등 시설이 함께 옹기종기 모여있고 또 시내쪽으로 7백「메타」 가량 들어가서 이 지방에서는 제1 크다고 할만한 「복자회」에서 경영하는 「성모성심병원」이 있다.
신자 수는 11개처의 공소교우를 합쳐서 3천2백명인데 본당 아래서만 2천명이 되는 적지 않은 교세다.
신자들의 사도직(使徒職) 단체로는 『레지오·마리에』가 11개 「쁘레시디움」이 있고 『천지의 모후』 「꾸리아」(地方評議會)까지 있으며 이밖의 단체로서는 청년회 성모회 그리고 55세 이상되는 노인들로 구성된 「시몬회」 등이 있다.
본당의 역사는 꽤 오래되는데 역대(歷代) 주임신부로는 <안드레아> 유(柳興模) <아오스딩> (金俊弼) <멜키올> (金永浩) <이나시오> 전(全碩在) <요셉> 유(柳善伊) <요안> 김(金兌浩) 신부 등이 이 지방을 거쳐가셨으며 현재의 함(咸) 신부로서 제9대 본당신부를 뫼시게 되는 것이다.
오래 묵은 본당이 되어 신자들의 신앙심이 뿌리깊어 좋은 면도 있지만 한편 타성적(惰性的)인 신앙태도와 냉담자 수도 상당히 많았는데 1959년 11월6일 함신부의 부임 이후 『교회의 본정신과 본규칙대로』라는 「못토」 아래 신심생활면에 눈뜨일 만큼 개선되고 진보되어 주일이 아닌 매일미사와 만과(晩課) 시간에 성당이 비좁을 정도로 모여 교우들이 언제나 그들의 하루 생활의 시작과 마감을 성체 앞에 나아와 봉헌하고 감사하는 기쁨을 느끼리만큼 열심하여졌으며 고해와 영성체자가 많기로도 유명하여졌다 한다. 평일(平日) 미사는 오전 여섯시에 드리고 주일에는 여섯시와 일곱시 반, 그리고 11시 세 차례 미사가 있고 또 매일 저녁 만과와 성시(聖時) 신공이 있다.
『교회의 장래희망은 오직 자라는 새 시대에 있다』는 본당 신부의 교육방침은 학생들이나 아동들의 교리지도에 중점을 두고 학교에 갔다 오면 어떻든 교회에 와서 놀도록 하는 것이 본당신부의 소원으로 그래서 도서관(서적 2백50권) 배구(排球) 야구, 탁구, 축구 등 운동기구와 시설을 마련하여 주었으며 국민학교 아동반 중학생반 고등학생반으로 교리반을 편성하여 엄격한 교육방침이면서도 혹시 잘하고자 한 것이 뜻밖의 실수를 하는 경우에는 오히려 위로해 주면서 너그럽게 대해주는 신부님의 아량에 더욱 끌리는 것이다.
그러나 교리지식이 부족하여 『내종냉담자가 될 정도면 차라리 배우지도 말라』는 엄격주의로, 자녀들이 교리공부나 신심생활에 대한 열성이 부족하면 그 부모에게 성사를 거부하기까지도 하는 철저한 훈육을 하고 있어 목요일의 「학생미사」에는 2백명의 학생들이 참여하는데 이들 중에는 10리 밖에서 오는 학생들도 있지만 언제나 다 모이지 않으면 신부님이 미사를 시작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항상 기구의 생활이라야 한다』 이 말은 함신부가 언제나 신자들에게 강조하는 말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