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公議會史(공의회사)] 제19차 「트렌트」 公議會(공의회) (上)
會議其間(회의기간) 18年(년)이나 끌어……
人間自由, 傳統敎理 等 再闡明
발행일1961-08-06 [제289호, 4면]
교회사상 가장 오래 걸렸고 또 중요했던 공의회는 1545년에 시작하여 1563년에 끝난 제19
차 「트렌트」(뜨리덴띠노) 공의회이다. 18년 간의 이 공의회 기간 중 5위의 교황이 등극하였다.
또한 이 공의회는 2회나 해산되기도 했다. 25회의 개회(開會)를 통한 3회의 회기(會期)는 1545년에서 1547년 1551년에서 1552년 1561년에서 1563년으로서 근 7년에 달했다.
「트렌트」공의회는 당시 「프로테스탄트」 종교 개혁자들에 의해서 공격받은 가톨릭 교리의 수많은 중요문제를 명확히 하고 이를 선언하기 위하여 개최되었으며 널리 만연된 악습과 개탄할 만한 사실로부터 교회를 쟁화(爭化)하기 위하여 모였었다.
이 공의회는 「알프스」의 장대한 골짝을 형성하고 있는 「아디제」 강(江)기슭 「트렌트」의 아름다운 「티로레즈」시에서 개최되었다.
이 공의회 장소는 「프로테스탄트」에 대한 양보(讓步)로서 선택되었었다. 당시 「트렌트」는 구(舊) 「오지리」 제국에 예속되어 있었다, 「루터」파들은 만일 공의회가 「독일」 땅에서 개최되지 않는다면 『평화회담』에 참가하지 않겠다고 공언(公言)했었다.
1517년 <말틴 루터>가 「성청」에 대하여 반항의 불꽃을 튀긴 파멸적인 해(年) 이후 수백만이 교회를 차버리거나 혹은 모독(冒瀆)하면서 교회의 품 안에서부터 사라져 나갔다.
이 시대의 「프로테스탄트」 논증은 가톨리시즘으로부터의 대거(大擧) 변절(變節)이 가톨릭 교회 안의 신앙과 도덕의 타락(타落)에 대한 반응이라고 주장하였다.
모든 시대의 교회에 대한 참다운 정의(正義)를 이행하기 위하여 우리는 묵은 신앙이 절대로 변하지 않았다는 것과 교회 안에 존재한 폐습(弊習)은 종교개혁을 가져오게 한 몇 가지 중요한 원인 중의 불과 한 가지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반드시 보여줘야 했었다.
그러나 한 가지 중요한 사실만은 올바르게 기록되어야 한다. 즉 가톨릭 신앙을 부인(否認)한 막대한 수의 사람들은 그것을 더 이상 이해하려 들지 않았으며 가톨릭 신앙의 도덕적 가르침에 반대하는 자세(姿勢)로서 생활해 나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역사는 초기 「프로테스탄트」들의 대부분이 무지(無知)했거나 애매 했거나 그렇지 않으면 좋지 못한 가톨릭 신자였다는 사실을 증명하고 있다.
교회를 소리 높여 비방(誹謗)한 이들은 그들 자신이 망언(妄言)의 죄악을 범하고 있다. 더구나 그들의 새로운 종교는 단순히 낡은 악습 이면의 인간정신을 지속시키고 있다. 즉 자연주의 정신과 자기만족(自己滿足)과 자만심(自慢心)이 그것이다.
초기 「프로테스탄트」 인사들은 타락된 가톨리시즘에 대하여 크나큰 소동(騷動)을 일으켰으나 그들이 진실로 두려워한 것은 엄격한 가톨리시즘에의 복귀였다.
<루터>는 그들에게 편리한 구원방법을 제공하였다. 그것을 구원의 완전한 보증(保證)으로 확언했다.
죄(罪)는 선행(善行)보다 중요치 않은 가벼운 것으로 되어버렸다.
개혁된 교회는 고해(告解)와 주일미사 의무 대소제(大小齊), 교회에 바치는 교무금 등이 없어져 아주 간편해졌다.
선행은 구원을 위하여 필요치 않다는 <루터>의 견해(見解)는 그당시 수없이 많았던 얼빠지고 애매하고 심지어는 타락했던 수도자(修道者)들의 수도원과 수녀원을 텅텅 비게 하였다.
그들은 엄격한 수률(修律)에 따른다는 그들의 서약(誓約)을 지킬 것과 자비(慈悲)의 사업에 자신을 바치겠다던 선서를 그와같은 것이 천주께 대한 탄원(歎願)이 되지 못한다는 구실로 모두 던져버렸다.
이와같이 되어버리자 「프로테스탄티즘」이 인계된 곳은 세속 군주(君主)들이 수도원과 교회의 다른 재산들을 쉽사리 장악하였다.
한편 서약을 지킬 것이라는 믿음을 견지하고 있는 수사와 수녀들은 가톨릭 지방으로 이주(移住)하였다.
결혼(結婚)을 스스로 선택한 자들은 예전 수도원 건물의 새로운 소유자로부터 은급(恩給)을 받아 살 수 있게 되었다. 교회 재산을 징발(徵發)하여 왕(王)이나 귀족(貴族)에게 바쳐진 값어치 없는 호기(好機)는 종교개혁의 급진적이며 격렬한 성공을 가져온 중요 요소(要素)가 되었다.
<루터>의 위치는 가톨릭 황제에 능히 반항하고 반발할 수 있는 몇몇 「독일」 제후(諸侯)들의 뒷받침으로 인하여 시초부터 견고하였다.
이리하여 결과는 잔인(殘忍)한 내란을 가져왔다.
더욱이 「독일」에서는 종교적 권한에 대한 공격이 곧 모든 권한에 대한 무서울만한 공격으로 이끌어갔다.
광신적(狂信的)인 「아나바프티스트」(再洗禮敎徒)들은 30만에 가까운 빈곤한 농민(農民)들에게 그들의 지주(地主)에 반항하여 봉기하라고 선동하였다.
가톨릭과 「포로테스탄트」 군주(君主)들이 폭동을 진압하기에 앞서 약 10만명이 전쟁으로 사망하였고 천군데 이상의 성(成)과 수도원이 재(炭)로 화하고 말았다.
「독일」서부터 이 새로운 종교는 「스칸디나비아」 국가를 휩쓸어 지나갔고 그곳의 통치자들은 국민들에게 그것을 강요했다.
「스위스」에서는 군인(軍人) 신부 <올리히 쯔빈그리>가 자기 국민들에게 이 새로운 사상을 선양했고 그는 대소제(大小濟)에 관한 교회법을 이이상 지킬 필요가 없다고 선언하고 신부와 수녀로 하여금 때로는 강제로 결혼할 것을 촉구하였다.
<쯔빈그리>는 종교는 단연코 개인 문제로부터 발생한다고 믿고 있는 종교개혁자들의 또다른 형(型)의 인물인 것이다.
그의 생활은 동정(童貞)에 반대하는 주장으로서 오점(汚點) 투성이였었다.
1522년에 그는 10명의 동료와 같이 신부가 결혼하도록 허용해줄 것을 그들 주교에게 탄원했다.
그들은 주교에게 『당신의 존경할 만한 지혜(智慧)는 우리들이 지금까지 모든 사람에게 막심한 추문(醜聞)을 주는 가운데 불행하게도 한 여인(女人)과 같이 살고 있는 수치스러운 생활을 목격했다고 믿는 바입니다』라과 말하였었다.
<루터>의 그것과 같이 <쯔빈그리>의 목적은 자기 국민을 유혈(流血)의 내란 속으로 끌어들이는 데에 있었다.
또한 <쯔빈그리> 자신도 1531년에 전쟁에서 쓸어졌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