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 首相(수상) 아닌 「마냐니」 신부 孤兒(고아)의 아버지
발행일1960-11-27 [제256호, 4면]
서부독일의 공업도시 「슈렛트갈트」 서쪽 60「키로」지점에 「구링게」라고 불리우는 아름다운 언덕에 둘러싸인 적은 마을 「세닷하」라는 곳이 있다.
활기있고 기쁨이 충일한 이 마을도 지금부터 15년전은 「나치스」 정권의 잔인성이 짓밝어 음산한 곳이었다. 사람들은 인종구별도 없고 남녀구별 없이 「힛트라」 군대에 의해 강제 노동을 당하고 거역하다가는 귀중한 생명을 그들 총탄 아래 희생당했었다.
2차전후 이곳은 첵코, 쏘련, 항가리, 리도아니아에서 쏘련군을 피해온 피난민들에게 사랑의 보금자리를 제공하는 곳이 되었다. <하인리히 마냐니> 신부는 이들 피난민을 매일 상대했다.
이 신부를 처음 만나는 피난민들은 그가 쏘련수상 <후루시쵸프>와 쌍동이 같이 닮은 것에 한번씩 놀랐다. 비대한 몸집 헤아릴 정도의 머리털 <후>보다 약간 적은 키에 두턱(二重의 턱)을 흔들며 웃는 모습은 곧잘 변덕쟁이 「크렘린」의 폭군을 회상시켰다. 「구렁게」의 고아들 친구이며 아버지인 이 「수단」 입은 <후루시쵸프>와 이야기하면 어느새에 정이든다.
「이태리」인의 양친을 모신 이 <마냐니> 신부의 부친은 「미쟁」(在官)이다.
이 청년은 1915년부터 18년까지의 세계1차대전에 참가하였다가 대전후 「후리부루구」의 신학교에 입학하여 1926년 신부가 되었다. 그는 「마인함」 등지서 사목생활을 했으나 「미쟁이」피를 타고난 신부는 건설욕(建設慾)에 사로잡혀 애덕의 사도로서 사회복지사업의 건설에 발을 내디덨다.
<마냐니> 신부는 집 없는 사람들에게 살림집을 지어주거나 알선해주는데 전력을 했다. 신부는 「후리부루그」에 있는 성당들을 찾아다니며 『새로운 조국』이다라고 이름한 조직운동을 시작했다. 털럭대는 고물차로 신부는 굶주리고 헐벗은 피난민을 구하기 위해 수천리를 다녔다.
이와같은 신부의 노력을 힘입은 피난민은 백합이 곱게 단장하듯이 나는 새들이 하늘이 주신 자연에서 얻는 무진장의 먹이로 매일을 노래하듯 피난민들은 보금자리를 마련하고 생활을 윤택케 할 수 있었으며 독일 전체도 같이 눈부신 부흥을 했다.
신부는 교회문병원 입구 길가에 버려둔 젖먹이들을 수리한 대전때 쓰던 수용소에 모았다. 이곳 10만평방「미터」의 수용소 자리에는 3백의 식구가 <마냐니> 신부를 쳐다보며 살았다. 서독의 전대통령은 이신부에게 1958년 6월 연방제 1급공로장을 수여했다.
신부는 그의 아들들에 특수교육대신 가족이나 어머니를 가진 아들과 딸로 기루는데 노력했다. 그리하여 신부는 독일 일류(一流) 건축가 <웨버>, <슈밑>, <룩스> 등 건축가설계로 한집에 최고 9명 정도가 살 수 있는 고층 「아파트」 대신 일반가정과 같은 적은 집을 지었다.
집집마다에는 피나 살이 섞이지 않은 그러나 가톨릭적 애덕으로 충만한 어머니가 한분씩 그들을 보살폇다. 이 어머니들은 18세부터 40살까지의 어머니다. 고아들의 어머니가 되기위해 특별한 소명(召命)을 받은 독신여성들이다. 각 가정에는 현대식 문화기구로 정돈되어 있고 일반가정과 조금도 다름없는 평화가 깃들려있고 모든 것이 질서정연하다. 교회당국이 칭찬하는 것은 물론이다.
이곳에 세운 주택건설비로 약6천 「말크」를 <뎃피히> 시니부가 기부했고 주택건설형제회 창시자 <스트라든> 신부는 피난민 주택건설을 하면서 <마냐니> 신부에게 회원들을 보내고 도로건설, 주택건축을 응원했다. <마냐니> 신부는 생활비를 매주 3만8천 「말크」를 지출한다. 그러나 신부는 돈의 염출(염出)을 천주섭리에만 맡낀다.
1948년부터 지금까지 2천이 넘는 고아가 자라서 신부께 감사하며 훌륭한 사회인이 되어 이집9가정)에서 나갔다. 영원히 <마냐니> 아버지를 생각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