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國政治(미국정치)서 云謂(운위)되는 反(반)가톨릭의 根源(근원)
발행일1960-11-27 [제256호, 4면]
(基 2)
淸敎徒의 偏狹
<에리자베스> 여왕 통치시대의 「영국」내의 종교투쟁과 가톨릭나라인 「불란서」나 「서바나」 와의 전쟁기간을 통하여 애국심(愛國心)이 「프로테스탄티즘」 과거의 동의어(同義語)가 되어버렸다.
이런 느낌은 「영국」교회가 국교로서 제정되고 공공기금에 의해서 유지되고 있는 「버지니아」 주에서 특히 그러했다.
「마사츄세트」주에 도착하기 시작한 이주민(移住民)들은 대부분이 청교도(퓨리탄)로서 열렬한 「프로테스탄트」였고 가톨릭교회로부터 이어받은 모든 의식상의 형적(形跡)을 영국교회로부터 제거하고 『정화(淨化)할 것을 원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비단 가톨리시즘만을 특별히 혐오(嫌惡)한 것이 아니라 청교도들은 그들 자신의 종파인 「퀘이커」나 침례교 등 모든 신앙단체에게도 편결적이었다.
이런 것을 볼 때 가톨릭 대통령이 종교와 국가를 분리하겠다는 약속에 대하여 불안을 아니가질 수 없고 모든 공직 사사생활에서 반신권정치(半神權政治) 사회를 이룩한 초기 「아메리카」 사람들에게는 분리론이 너무나 「아이로닉」한 이야기가 아닐 수 없었다.
물론 「뉴잉그랜드」에서 가톨리시즘을 경원(敬遠)하던 사상은 「영국」으로부터 계승되어 왔다.
다만 극히 소수의 가톨릭 신자만이 이 지방에 있었고 심지어 「마사츄세트」주에서는 법령으로 가톨릭 신자의 증가를 막았고 주경계(州境界)를 넘어온 신부(神父)는 추방하거나 재범(再犯) 일때는 사형에 처혔다.
「메리랜드」에서도 일어난 이와같은 강력한 감정(感情)은 단지 명목상으로만 가톨릭신자가 존재한다는 정도의 결과에 불과했고 이 지방은 소수의 가톨릭신자들이 개척한 곳이기도 했다.
처음에는 소수의 가톨릭신자만이 이곳에 정착하여 개척했으나 불과 몇년후에 수많은 「프로테스탄트」들이 이 지방에 모여들어 그들을 추방하고 모든 공직에서 가톨릭신자를 법의 보호조차 거부당하였다. 「버지니아」에서도 투표의 권리와 관직에서부터 가톨릭신자를 배척하였다.
이렇듯 만사는 가톨릭신자에게 더욱 악화되어 갔다.
18세기에 이르러 「영국」과 「불란서」 및 「서바나」의 서로 상의한 야심(野心)은 「아메리카」 내의 연쇄적인 식민지전쟁의 결과를 가져왔다.
「영국」 이민에 대하여는 남부의 가톨릭 「서바나」인과 북부와 서부 가톨릭 「불란서」인에 의하여 고통을 당하여 반가톨리시즘이 즉 철저한 「애국」심이 되어버렸다. 「메리랜드」에서는 억압적인 법령을 통과시켰고 「뉴욕」에서는 모든 가톨릭신자들을 무장해제시키고 노동력에만 충당하였다. 동북부의 모든 주(州)에서는 가톨릭신자를 공직에서 몰아내고 법의 보호로부터 제거하였다.
「뉴우함프샤」에서는 「로오마」에 반대하는 서약을 하라고 전체주민에게 요구하였다.
비록 관대한 「펜실바니아」 조차 가톨릭신자들을 무장해제시키고 그들에게 특별세금을 부과하였다.
한마디로 해서 「아메리카」 초기 반가톨리시즘 역사를 통하여 무엇보다도 가장 강력하게 그것이 대두하였고 사람들의 특징을 가장 광범위하게 이용 통합한 것이 바로 이때의 반가톨릭이라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려나 이것으로 인해서 가톨릭세력이 영영 죽어버린 것이 아니다. 그래도 미국 독립전쟁에 가톨릭신자들이 「아메리카」를위하여 바친 희생과 공로는 적게 평가할 수 없으며 불과 2만5천 전체 가톨릭신자들이 이루어 놓은 공로는 후에 「독립선언서」에 한명의 서명인을 낼 수 있었다. 그가 바로 「매리랜드」의 <촬스 캐롤>이다.
이것은 미국정부의 원칙인 신앙의 자유를 이룩하는데 진일보하고 완화적인 잔조(殘照)라고 볼 수 있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