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史(사)를 만든 사람] (10) 「로욜라」의 성 <이나시오>(Ignatius de Loyola)
발행일1961-08-13 [제290호, 2면]
「예수회」 창설자, 반종교개혁의 지도자 1491년 12월24일 「스페인」 북부 「바스크」 지방의 유명한 「로욜라」 성(城)의 영주(領主)의 아들로 출생.
군인으로 출세하려고 「스페인」과 「불란서」 전쟁 때에 출정하여 「광쁘로나」 전투에서 중상을 입고 불구자가 되었다.
성 <이나시오>는 이때에 『그리스도전』(傳) 및 『성인전』을 읽고 개심하여 「몬트세라트」에서 성모께 헌신하고 「만세라」의 동굴(洞穴) 안에서 10개월간 묵상과 고행을 계속하였다.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지 「예루살렘」 성지를 순례한 후 1524년부터 「파리」 「발세로나」 「사라만카」 등지에서 연학하고 이때에 <방지거 사베리오>와 <화베르> 등과 친교를 맺었다.
1534년 8월15일 「파리」의 「몽마르뜨르」에서 서원(誓願)하여 청빈(淸貧) 정결(貞潔) 성지(聖地)의 포교 또는 그것이 실현 곤난할 시에는 교황의 명에 의해서 여하한 사목(司牧)에도 임할 의무를 질머졌다.
1537년에 신품받고 1540년에 선교황 <파우루스> 3세께서 「예수회」의 제1회헌(會憲)을 재가하여 1541년에 동회 총회장으로 선출되었다.
1556년 7월31일 「로오마」에서 사망. 1622년에 성인품에 올랐다.
성 <이나시오>는 16세기에 있어서의 반종교 개혁시대의 가장 특출한 지도자이며 그 심리적 걸작인 「심령수업」(心靈修業) 및 「영조」(靈_)와 그 활동성과 통일성에 있어서 독자적인 수도회인 「예수회」의 창립으로서 오늘날 가장 영향을 많이 주고 있는 인류의 종교교육가의 한 사람이다.
그는 조직적인 정력(精力)으로서 <칼빈>과 또는 종교적 체험의 극렬함에 있어서 <루터>와 대조(對照)되고 있다.
그의 투철한 신심과 집중력(集中力)은 「예수회」에 전하여진 그의 표어 『모든 것을 보다 더 높은 천주의 영광을 위하여』 주안에 그 정렬적인 표현을 나타내고 있다.
<이나시오>의 유해는 「로오마」의 「알제수」 성당에 안치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