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解設(해설)] 「수단」의 오늘
감옥이 改宗(개종) 「센터」
日曜監房(일요감방)은 교회가 되고
발행일1960-12-04 [제257호, 2면]
북부 「수단」 내에 있는 대부분의 감옥들이 근래에 와서 완전히 개종 「센터」로 화해버렸다는 보도가 전해지고 있다.
수감자 중의 이교도 무종교자 「프로테스탄트」 등이 가톨릭 수감자의 감화를 받아 바야흐로 가톨릭으로 속속 개종하고 있다. 비단 수감자뿐만 아니라 멀리 떨어진 촌락에서 살고 있는 가족조차 개종하고 있는 실정이다.
가톨릭 수감자들은 그들 자신이 개종사업의 역군으로서 활동하고 있고 일요일에 감옥부 신부가 「미사」를 올리려 이곳 감옥을 방문할 때는 감옥이 마치 교회화해버린다.
대부분의 수감자는 고해후 영성체하고 감방 창문마다 또는 높은 돌담 밖으로 묵주신공 합송 소리나 성가 합창소리가 새어나오고 있다.
대부분의 가톨릭 수감자들은 남부「수단」 출신이며 남부「수단」에는 현재 약 3십만의 가톨릭과 십만의 「프로테스탄트」 및 2백5십만의 이교도 무종교자들이 있다. 북부 「수단」은 주로 대부분이 회교도로서 인구 약8백만을 헤아리고 있다. 현재 수감되어 있는 가톨릭 신자는 북부「수단」 장악하의 정부에 반항하였다는 죄과로 보통 15년 이상을 선고받고 있다.
또한 현재 수감되어 있는 4천명 남부인중 그 반수가 그리스도교인이며 나머지가 이교도인이다.
1956년 초에 남부의 죄수들을 북부 감옥으로 이송하였다. 당국은 성직자의 감방 방문을 허용하고 있고 신부들은 일주일에 일회씩 그들을 방문한다. 이와같이 하여 감옥 내의 모든 「프로테스탄트」와 이교도 무종교자들은 감옥 안에서 가톨리시즘을 배울 기회를 가지고 있다. 그들 대부분이 이미 개종 내지 입교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그들은 진심으로 가톨릭 교리를 동료 가톨릭 수감자로부터 배울 뿐만 아니라 그중에는 교리지도자나 선생이 된 자들도 무수하다. 1956년까지만해도 가톨릭 수감자들은 수천리 떨어진 자기네 집에서부터 기도서나 교리책을 가져왔고 교리지도는 먼저 자기나라 언어를 가르치고 다음에 묵주신공이나 요리강론을 가르쳐왔다.
그들이 보통 편지를 완전히 해독할 수 있을 때가 되면 비로소 영세를 받았다.
그러나 신부의 시험(찰고)을 받지아니하면 교회에 들어옴을 결코 허용하지 않았다.
홍해(紅海)에 연한 지금은 폐쇄된 항구도시 「수아킨」에서는 단지 몇명의 가톨릭 수감자가 무려 3백명 이상의 이교도 무종교자를 지도하였다.
하루평균 6십명이 영세받고 그들이 완전히 영세를 끝마친 후에 「칼룸」교구장 <바로니> 주교가 그들을 방문하였다.
개종한 대부분의 수감자들은 자기 부인이나 가족에게 서신으로 연락하여 가톨릭으로 개종하도록 권고해 왔고 그들이 출감후에는 머지않아 전가족이 개종하고 있다.
이와같이 하여 남부 「수단」의 여러 마을과 촌락이 아무도 모르는 새애 혹은 반대를 무릎쓰고 참다운 신앙을 찾고 있다. 「칼룸」에서 약1백 「마일」 떨어진 「와드메다니」 감옥에서는 일요일이면 다 떨어진 담요로 제대를 꾸미고 모든 수감자들이 고해를 받고 영성체 하고 있다.
물론 그들 수감자들은 목에 쇠사슬이 매여져 있고 노동할 때나 휴식할 때나 심지어느 ㄴ잠잘 때에도 쇠사슬에 매인채이긴 하나 그들은 한결같이 마음이 극히 평화스럽다고 이구동성으로 말하고 있다.
그들은 「미사」경본을 해득할랴고 무척 애쓰고 있으나 불과 1명 내지 2·3명뿐이 「라띤」어를 읽을 수 있을 정도이다. 그러나 비록 뜻을 해득못할지언정 「그로리아 빠드리」 「꼰피떼올」 「도미누스 보비스꿈」과 같은 대답을 우뢰와 같이 소리높여 부르고 있다.
악보 하나 읽을 수 없는 그들은 한사람이 먼저 성가 실마리를 노래부르기 시작하면 금시에 전 감방이 성가합창으로 울리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