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포] (50) 釜山(부산) 東萊(동래)
발행일1960-12-04 [제257호, 3면]
동래 온천장행 「뻐스」와 전차는 학생들판으로 생지옥이 되곤 하지만 오늘따라 더 좁은 것 같다. 부산사범대학 입구를 지나 동래극장 옆에서 겨우 몸을 빼어 내렸다. 비교적 평화스럽고 조용한 거리를 지나 총총걸음으로 학수대(鶴首台)쪽을 향해 걸었다. 어느책에서인가 『동래 부죽 별부죽』이라는 대목을 읽은 기억이 난다. 옛날부터 동래 연죽(담뱃대)과 수저(手箸)는 너무도 유명하거니와 그중에서도 송학죽(松鶴竹)과 별은죽(別銀竹) 같은 것은 옛날 세도께나 부리던 사람들에겐 큰 보물로 여겨지던 것이다.
지금도 한국에서 대(竹)께나 만진다는 사람치고는 동래원주민이 아닌 사람은 없을 정도다. 마치 학(鶴) 모양으로 생겼다고 학수대라고 불리워지는 이곳 중허리에 세워진 건물이 바로 기자가 찾는 동래(東萊福泉洞) 천주교회였다. 신부님께 찾아온 동기를 말했더니 사제관을 짓느라고 분주한 신부님은 오래전부터 이곳으로 이주해왔다는 할머니 교우 한사람을 소개해 주었다. 35년전 이곳으로 이주해왔다는 <안세노> 이(李鍾祥=64) 노인의 이야기는 대략 이러했다.
지금부터 40여년전 지금 대구(大邱)교구에 계시는 <베드루> 김신부의 조부님과 최회장(=당시 성명미상)님이 「천주교협의회」를 조직하여 씨를 뿌린 것이 시초가 되어 지금 부산진(釜山鎭) 천주교회에 계시는 <남> 신부님(불란서)이 동래읍 낙민동(樂民洞)에 공소를 짓고 불과 남교우 세사람 여교우 몇사람이 새살림을 차리게 하였으니 이것은 지금부터 35년전인 1925년의 일이었다. 그후 동협회가 맹렬히 활동하여 모은 돈과 교우들의 추수곡(秋收穀)을 걷우어 3백8십5원5십전을 받고 낙민동 공소를 팔아 현 유치원으로로 사용하고 있는 붉은기와집 한채를 사서 살림을 옮겼던 것이다. 그후부터 이곳이 몸이 허약해진 신부님들의 수양지가 되었던 것이다.
1951년 11월 진해(鎭海)의 <글레멘스> 김(金忠務) 신부임이 휴양차 이곳에 있는 동안 본당건설을 생각하고 1954년 11월 뜻이 성공하여 미군(美軍)의 원조로 건평 64평의 현 성당을 신축하고 정식분당으로 승격하였다. 그후 삼년째 되던 해 김신부는 진해로 돌아가고 현 <야고버> 이(李泰俊) 신부가 후임으로 이곳에 와서 지금에 이르렀다. 월래 이곳은 범어사(梵魚寺)를 중심으로 한 불교가 활기를 띈 곳이라 전교활동에는 좀처럼 능률이 오르지 않고 있다는 것.
특히 바로 건너편에 「범어사표교사」가 자리잡고 맹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가톨릭 「액숀」은 십여년전 조직된 「부인회」를 이어 여교우들로 조직된 「샛별단」이 길사나 흉사를 맡고 있다는 것이며 이밖에 소년, 성인의 「레지오 마리에」도 조직되어 구령의 손길을 뻗고 있다.
그런데 <이> 노인의 조카 한분이 마지막 수난기에 치명하셨는데 그분이 바로 <요왕> 이(李선달) 복자이며 이곳의 큰 사랑꺼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