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과 共産主義(공산주의)
발행일1961-08-13 [제290호, 4면]
【편집자 주】 본고는 부산교구 학생연합회 지도 <안젤로> 김(金南洙) 신부가 광주시 「사레지오 남자 중고등학교」에서 개최된 제7차 「대한가톨릭학생연합회 전국대의원대회」에서 1주간에 걸쳐 강론한 강론전문입니다.
■ 共産主義와 「볼쉐비즘」
공산주의와 「볼쉐비즘」을 두 가지 별개의 학설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볼쉐비즘」이 바로 공산주의인 것이지만 <맑스>가 이론화한 사회주의의 특수한 실현형태(實現形態)가 「볼쉐비즘」인 것이다. 「볼쉐비즘」의 특색이라면 그것이 국가적인 동시에 국제적이라는 특질을 말할 수 있다.
<맑스>의 사회주의 이론이 구체적으로 「러시아」라는 지반(地盤)에서 <레닝>에 의하여 현실화한 것이 「볼쉐비즘」인 것이다. 그런데 「볼쉐비즘」에 있어서는 「러시아」 지반이 「프로레타리아」의 세계혁명 실현을 위한 하나의 「스프링 보-드」에 불과한 것이기 때문에 「볼쉐비즘」은 이미 본질적으로 국제성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볼쉐비키」적 공산주의는 한편으로 「쏘비엩」 연방의 지배권과 다른 편으로는 제3 「인터내쇼날」로서 대표되는 것이다.
■ 共産主義와 그리스도敎
공산주의는 그리스도교의 국제성과 초국가성을 그대로 본따서 대립적 내지 적대적 세력으로 출현(出現)한 것일진데 가톨릭 입장에서 본다면 공산주의적 「볼쉐비즘」은 가톨릭을 위시한 전체 그리스도교와 구라파의 그리스도교 문화에 대한 극히 철저한 선전포고라 아니할 수 없다.
이론적인 학설로서의 도전일 뿐 아니라 실천적인 세력으로서의 선전포고인 것이다. 근대사상 권내에 나타난 가지가지의 신(神) 부정의 다른 이론이나 학설과 공산주의를 비교해보면 공산주의는 다른 종류의 무신론처럼 신학적 입장에서 신을 비판하려드는 무신론이 아니다. 바로 전투적인 반신운동인 것이다.
이론으로 사람들을 납득시키려는 운동이 아니다. 목적을 위해서는 순단과 방법을 가리지 아니하는 선동과 「테로리즘」으로 임하는 것이다.
선동에 넘어가지 않는 지식층에게는 총칼로 임하는 것이다.
쏘련을 위시해서 그 위성국가들 안에서 총칼에 쓸어진 성스러운 순교자들이 공산세력의 「테로리즘」을 증명해 주고 있다. 또 공산주의자들은 대중선동을 위한 「못토」로서 『백 번 속여라 이백 번 속여라 대중도 드디어 믿는다』라는 <레링>의 기본 태도를 고수하는 것이다. 그 방법으 ㅣ제일보로서 <레닝> 자신이 반신(反神)운동의 신조를 만들었으니 그는 말하고 기록하기를 『신은 이미 오래 전에 죽었다. 신의 시체는 하늘을 향하여 악취를 뿜고 있다. 종교적 것이든지 형이상학적 것은 전혀 관심할 바 아니며 일체의 신(神) 신앙을 시체능욕(屍體凌辱)이라는 병리학일장(病理學一章)에 속하는 것이다』라고 용감한 단언을 내렸다.
그 후 이상명제(命題)는 공산주의 선전의 유일한 신조로 대중이 믿을 때까지 백번 천번 만번 되풀이되어 입에서 입으로 옮아가며 외쳤던 것이다. 이 신조에 충실한 오늘날의 「항가리」 「루마니아」 공산주의자들은 등교하는 어린 학생들에게 선생님께 아침 인사로 『신은 없읍니다』고 하라 하고 선생들에게는 『신은 없었다』로 답례를 하도록 강요하여 현재 실천하고 있다 한다. 이것이 『왜』라는 인간 정신생활의 본능을 거부하고 반신운동을 전개하고 있는 모습이다.
■ 共産主義의 宗敎觀
공산주의는 그리스도교로 대표되는 모든 종교를 거스려 투쟁하는 세력이다. 그들이 전개하는 이론은 모두다 증명 없는 결론뿐이오 이유 없는 주장뿐이로되 여러 번 되풀이 하는 그드르이 선견방법이 대중의 올바른 판단을 말살시켜 버리는 데에 적지 않게 성공한다. 공산주의에 의하면 종교는 권력자나 자본주들이 빈곤자와 무권력자들을 지배하기 위한 수단이며 민중의 「아편」인 것이다.
이와같이 종교적 신앙을 문화의 진보나 사회저의를 압복(壓服)하기 위한 심리적 압력의 근원이라 해석하는 그들이 인간에 대한 그리스도교적 관념과 인간이 천주의 모상대로 창조되었다는 그리스도교의 중심사상을 인정치 않을 것은 극히 명백한 일이다.
■ 共産主義와 神
공산주의에 의하면 인간이 천주의 피조물이 아니라 오히려 신이 인간의 피조물인 것이다. 인간이 신을 창조하되 인간의 정신능력이 발달해서 고상한 인간의 요구로서 신개념을 형성하는 것이(近代哲學者들의 意見=Kant) 아니라 인간이 몽매한 탓으로 아무 것도 아닌 신을 가상신봉(假想信奉)하는 것이라 한다. 즉 인간이 신의 개념을 가지는 것은 인간완전성의 찬미가 아니라 인간비열의 결과라는 것이다.
세계를 개혁하고 세계를 향상시키기 위하여 배출되는 위대한 인물이 있다면 그는 <니체>가 말한 『초인』(Ubermensch)에 불과한 것이라 한다.
■ 共産主義와 西歐文化
인간의 본질을 이상과 같이 이해하려 드는 것은 분명코 구라파 전문화에 대한 공소불능(控訴不能)의 사형선고가 아닐 수 없다.
최근의 물질문명과 동반한 순 기술적 경제노력을 제외한다면 구라파의 전문화가 언제나 피안의 문제해명에 노력했고 신인식(神認識)과 신찬미에 진력해왔던 것이다.
공산주의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만일에도 신이 인류역사상에 있어서 노예소유권자들의 「빽」 노릇밖에 못하였고 인간이 어리석은 관계로 신봉하던 가상적 존재밖에 아무 것도 아니라면 종교, 철학, 예술 각 부문에 걸쳐서 인간이 창작해낸 것들 전부가 허망한 일밖에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결론을 지을 수밖에 없다. 중세의 「스코라」 철학에서 19세기의 위대한 관념론의 제체계에 이르기까지의 온갖 종교 철학 전체가 뜻없는 개념의 유희에 불과했을 것이고 일체의 예술과 신비라는 것도 주관적 체험의 병적현상이 되고말 것이다. 가톨릭 교회와 소위 종교개혁, 문예부흥 같은 것과의 투쟁에는 분명 현세적인 요소가 섞여있기는 하였으나 그 근본에 있어서는 천주와 인간, 천주와 자연, 천주와 역사의 관계를 바로 파악하려는 방법의 차이가 포함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근본동기를 도외시한다면 중세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의 중대한 역사적 현실도 아무 목적없는 닭싸움에 불과한 것이라 말해야 할 것이다.
■ 共産主義와 藝術
예술에 있어서도 역시 동일한 결론이 나올 것이다. 일체의 천주 찬미, 인간 영혼의 온갖 희망과 환희 가지 가지 고민과 불안, 이런 모든 것들이 혹은 조각으로 혹은 그림으로 혹은 음악으로 표현된 것이 인류역사상의 예술이로되 공산주의에 의하면 이런 예술적 작품들은 공연히 방안을 어질러 놓는 휴지, 쓰레기 먼지에 불과한 것이다. 엄숙한 교회예식은 모조리 몽매한 민중의 구경거리일 뿐, 수도원은 자연생활 법칙을 거스리는 무의미한 투쟁의 성벽이고, 「코틱」, 「바롴」 「로만」식 등의 아름다운 성당들은 멋없이 높은 탑 뜻없는 돌멩이의 집일 뿐 아무런 가치도 없는 것이다. 또 공산주의에 의하면 그리스도교적 국가는 모두다 정치적 반동과 경제적 착취의 보호자이며 그리스도교적 가정은 부인의 노예화 외에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결론이 나오게 된다. 이와같이 공산주의는 철저한 가치전도(價値顚倒)를 이론화하고 있는 것이다.
<맑스>에 의하면 의식있는 「프로레타리아」적 투쟁의 시기가 인류역사의 시초이고 그 이전의 역사적 사실 등은 모두다 인간이 아직 인간성을 구비하기 전에 이루어진 것이며 인류역사 이전 것이라고 도매금으로 넘겨버린다.
■ 共産主義의 現在狀態
「볼쉐비키」적 공산주의 대(對) 그리스도교 내지 대 그리스도교 문화적 공적은 특히 세 가지 근거에 의해서 우리 입장에서 중대시 안할 수 없는 것이다.
첫째는 공산주의가 근대적 발달에 깊고 튼튼한 부리를 박고 있다는 점이다. 인문주의 사상의 시대부터 과거 사세기 동안 준비된 무신적 기초 위에 서있기 때문에 이 공산주의를 대항해서 승리할 수 있는 비(非) 그리스도교적 사상이나 이론이 거의 없을 정도로 튼튼하게 자리잡혀 있다는 점이다.
둘째로 공산주의가 단순한 학설일 뿐 아니라 일종의 혁명적이고 전투적인 활동이란 점이다. <맑스> 자신이 말하기를 「맑스주의 철학」은 『세계를 인식할 뿐 아니라 세계의 변혁을 원한다』 하였다. 그들은 그들의 목적달성을 위하여 방법과 수단을 가리지 않고 실천에 총동원되고 있다. 그들은 반대이론은 전혀 무시하고 그들의 목적에 동조하지 않는 자는 모조리 반동으로 처단하고 그 목적을 실천하는 것이다.
셋째는 「서구」(西歐)에 있어서 공산주의를 실제로 대항하고 일어선 세력이 서구문화를 옹호하기 위하여 그리스도교에로 돌아가지 아니하고 다른 종류의 서구 전통세력에로 돌아가고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교 자체의 부흥시기를 더욱 지연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공산주의 운동을 위해서 심히 유리한 현상이 아닐 수 없다.
■ 그리스도敎의 危機
이상과 같이 공산주의를 살펴보면 공산주의와 「볼쉐비즘」 문제는 그리스도교 문화의 일반적 위기와 비그리스도교 민족에 대한 그리스도교의 사명에 관한 문제에까지 확대되는 것이다. 대(對) 공산주의 투쟁에 나선 그리스도교는 그리스도 신비체로서의 교회가 아니라 사회적 시설로서의 교회가 책임져야 하라 것인데 공산주의가 그리스도교 국가들 가운데서 이론화 되었고 그리스도교 국가인 「러시아」에서 성공하게 된 것은 사회적 시설로서의 그리스도교가 실패하였다는 논평을 강요한다.
개인과 인류 전체가 건전하고 행복한 지상생활을 향유하기 위하여 절대 불가결의 전제조건인 진리와 자유와 정의의 삼대근본리념(三大根本理念)의 조화가 실현되었어야 할 것인데 이 삼대이념은 16세기 이래로 끊임 없는 혈투를 계속해 왔던 깓락에 현재와 같은 비참한 결과를 맛보게 된 것이다.
그리스도교적 진리는 천주이시라 천주를 아는 자만이 참으로 자유로워질 수 있다.
『너희는 진리를 알 것이요 진리가 너희를 속량하여 내리라』(요안 8.32)
이 때문에 일체의 그리스도교 문화는 종교와 결부되는 것이오 또 그 때문에 창조적이며 자유로운 문화인 것이다.
또 그리스도교적 정의는 사랑에 뿌리박고 있다. 정의도 역시 자유로운 인간, 즉 천주를 아는 인간만이 실천할 수 있는 것이다.
■ 眞理 自由 正義의 埋沒
그리스도교에 있어서는 진리 자유 저으이 교회문화 사회생활이 서로 분리할 수 없는 연결성을 가지는 것이로되 정신사상(史上)으로 과거 4세기 동안에 이 통일성이 온전히 분열되었을 뿐 아니라 각 요소가 서로 투쟁을 계속했던 것이다.
문예부흥 때와 소위 종교개혁 때에 반가톨릭적 계몽을 위해서 자연주의와 개인주의가 근본원리로 대두하였다. 계몽운동은 인간적 자유의 개념이 그리스도교적 진리개념에 대립하여 등장하였고 불란서 대혁명에서 승리하였다.
1670년에서 1770년까지의 지리(地理), 경제, 권력의 생리학, 기술학(技術學) 등 일연의 학설을 통해서 결정적으로 현세 동물로 자처하던 무신적(無神的) 인간이 드디어 승리하였던 것이다.
이런 무신적 인간과 그의 방종적 자유가 객관적 진리를 거스려(에 대해서) 승리를 거두었기 때문에 그리스도교적 진리 자유 정의의 조화는 온전히 파괴되고 말았다. 그리스도교적 자유, 제한된 자유에 대항하여 만들어진 인간적 자유, 인조자유(人造自由)에 항거하여 평등사상이 머리를 들었다. 평등이 고조(高調)된 근본은 1789년에 있었던 『모든 인간은 날 때부터 평등하고 평등한 권리를 향수하지 않으면 안 된다』라는 소위 인권선언과 다른 편으로 무소유자 등의 권리를 심히 제한하였던 각국의 헌법과 사이에서 제3계급이 발전한 명백한 대립 그것이었다. 자유가 평등을 빼았었던 것은 자유가 우애(友愛)를 거부하였던 필연적 결과였다.
인간이 공동 아버지신 천주를 인정할 때에만 비로서 인간 대 인간이 동포로서 우애를 가질 수 있는 것이다. 불란서 대혁명의 자유와 같은 천주를 반박하는 자유는 결코 이웃을 동포로 대접하고 사랑할 수는 없을 것이다.
실제로 제3계급의 자유는(人造自由)는 종시 일관해서 제4계급의 경제적 해방에 대해서 몹시 투쟁하였고 마침내는 제4계급을 전제정치에로 유인하였던 것이다. 이전 제정치의 최대 이론가가 <칼 맑스>이고 그 실행자가 <레닝>이다. 공산주의가 자유를 거스려 대적하는 태도는 역사적으로 보아 형식적인 법제상(法制上)의 자유가 최대의 현실적 불평등을 내포하였기 때문에 이것을 무력으로 유지하려던 「부르죠아」이며 이미 신을 잃은 「부르죠아」 사회가 당연히 받아야 할 복수작용인 것이다. 이 모든 것이 근본적으로 따지면 근대와 현대인간들이 진리, 자유, 정의를 잃었기 때문에 받아야 하는 천주의 의노(義怒)로서 고민하는 과정임을 부정할 수 없다.
이렇게 세계 정세를 보면 천주의 생명을 충실히 소유하고 그 때문에 일체의 진리통일을 소유한다고 믿는 그리스도교에 중대한 과제가 지워지는 것이다. 즉 그리스교적 신앙의 진리 그리스도교적 행동의 자유 그리스도교적 생활태도의 정의를 다시 통일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비오> 11세의 『무신적 공산주의를 배격함』(Divini Redemptoris)이라는 회칙에 명시된 바와 같이 이념(理念)은 행위를 선행하고 초월하는 것이기에 가톨릭 교도들은 일체의 비관적 징조에 구애됨이 없이 우리들의 이념실현 가능성에 대한 신념을 포기할 필요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