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公議會史(공의회사)] 제19차 「트렌트」 公議會(공의회) (下) (끝)
流血로 더럽힌 「프로테스탄트」 史
自由를 존중하면서 敎理를 再確認
발행일1961-08-13 [제290호, 4면]
…承前…
「서서」에서도 「불란서」 평신자 <죤 칼빈>이 「제네바」에 성서주의(聖書主義)를 설립하였다.
「제네바」는 성서가 통치하는 도시가 되었다. 그러나 그 성서는 다만 <죤 칼빈>이 해석한 것이다.
종교적 문제에 있어서 그는 가톨릭신자로서는 교황에 대하여 생각조차 할 수 없는 무류권(無謬權)의 정도(程度)를 상정(想定)하였다. <루터>와 <쯔빈그리>의 「프로테스탄티즘」이 쉽사리 진행되는 것과는 달리 「제네바」에서의 종교개혁은 공포(恐怖)와 억압(抑壓)의 제도였었다. 정신적 정치적 최고 실권자인 <칼빈>은 27년 동안을(1437년-1464년) 철봉(鐵棒)으로서 그의 시(市)를 다스렸다.
자기 가르침에 반대하는 자는 모조리 죽이거나 투옥하였다. 불의(不義), 이단(異端), 모독(冒瀆) 사신숭배(邪神崇拜)라고 그가 생각한 것은 모두 최고범으로 취급하였다. 당시 약 1만3천명 정도의 인구를 가진 「제네바」는 <칼빈>의 통치를 통하여 58명이 처형되고 76명이 유형(流刑)되었다.
「스파이」가 항상 국민들 사이에 암약했고 종복(從僕)은 자기 주인을 비밀히 고발하였다. 심지어는 자녀가 자기 부모들을 일러바쳤다. 극장과 도박장, 연주회 의상 전시, 목노주점에서의 음주, 가정에서의 오락「파티」 등은 엄격한 처벌을 가함으로서 모두 폐지되었다.
이와같이 하여 <칼빈>의 「프로테스탄티즘」은 그의 조심스러히 이룩된 이론을 멀리까지 전파시키기 위하여 그는 조직체와 「대학」(University)을 조직하였다. 「아카데미」라고 불리워진 이 대학은 「불란서」와 「잉그랜드」 「스콧트랜드」 및 「아메리카」(뉴 잉그랜드)와 같은 특정 지방에 「칼비니즘」이 정치적 우세를 차지할 수 있는 곳에 「성서주의」를 설립하기 위한 「목사」들을 훈련시키고 또 파견하였다.
한편 <헨리> 8세는 「종교분열」로 「잉그랜드」를 몰아넣었다. 교황이 <안 보린>과의 그의 불의의 결혼을 인가하지 않은 후 <헨리> 8세는 자기가 「영국교회」의 우두머리라고 선언하였다.
주교와 사제 귀족과 대의원들은 교황 대신에 왕에게 충성을 바쳐야 했고 그렇지 않으면 죽엄을 각오해야 했다.
한편 <헨리> 자신이 교회와 성지 수도원을 약탈하였다. 그러나 교황의 권능을 거부하고 수도원을 억압하기는 하였으나 <헨리>는 「영국」교회의 신앙과 예배와 관습에 변화를 주지 않는다는 것엔 묵인하였다. 그가 죽은 후(1543년) 「프로테스탄트」 신봉의 귀족의 일단이 어린왕 <에드워드> 6세를 지배하자 그들은 「영국」을 「프로테탄트」 국가로 시작하는데 서서히 또한 꾸준히 노력하여 왔다.
1556년에 왕위에 오른 <에리자베스> 1세 여왕하의 영국의회는 「가톨리시즘」과 「프로테스탄티즘」 중간치기의 「절충교회」(折衷敎會)를 설립하였다. 그러나 우선권은 「루터」와 「칼비니즘」 교리에 주어졌다.
「미사」와 사제직은 폐지되었고 주교들의 사도직 계승은 소실되었다. 이와같은 말할 수 없는 대혼잡에 첨가되어 두 명의 저명한 가톨릭 왕자인 「불란서」 왕과 「독일」 황제는 끝임없이 전쟁에 나가있었다.
더욱이 「독일」 황제는 서부전선에서 「불란서」와 싸우는 동안 동부전선에서의 「터키」군의 친입을 간신히 막아내었다. 열성 있는 가톨릭 교회인들이 근 30년간이나 노력하여 끌어온 개혁 「공의회」가 어찌하여 1545년에서야 개시되었는가는 이로써 잘 이해가 갈 것이다.
그러나 이때에 강력한 개혁운동이 교회 전반에 걸쳐서 대두하고 있었다. 출정(出征) 중에 있는 찬연한 제성인(聖人)들은 영혼의 회복을 위한 자기네들의 심대한 영향을 위하여 진력하였다. 낡은 수도원은 신생활의 고동(鼓動)을 느끼고 새로운 수도원이 설립되었다. 이와같은 위대한 두 개의 큰 힘인 「카프친」회와 「예수」회는 바로 이때에 생겨났다. 주교들은 1545년 12월13일 「트렌트」의 「쎄인프 비타리스」 대성당에서 열린 공의회 개회에 소집되었다.
개회시초부터 공의회의 일반적 경향은 주의 겸양(謙讓)과 두려움의 하나였다. 제2차 회기(會期)에서-(1546년 1월7일) 서기장은 「영국인」이며 <헨리> 8세의 가까운 친족인 덕행 높은 <레지날드포옥> 추기경이 성심에 전적으로 의뢰함으로서 모든 교부들이 천주께로 완전하게 돌아올 것을 요청하여 작성한 서문(序文)을 낭독하였다.
공의회의 인가를 위하여 제시된 첫 포고(布告)는 다음과 같이 제목붙여졌다.
『공의회에서 관찰되어야 할 생활방법에 관하여』
그것은 기구 특별「미사」 절제(節制) 단식 수행원의 감독 등의 「프로그람」이었으며 또한 또다른 조항은 공의회를 통한 심오한 정신적 분위기를 보지(保持)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공의회는 교황 <파울> 3세(1534년-1550년)에 의해서 소집되었다. 그와 공의회기간에 등극한 계승자들은 3명의 추기경 특사를 통하여 사회하였다. 교황들은 주교들이 충분히 협의할 수 있는 자유를 존중하고 또 보호하였다. 3명의 교황 특사는 <죤 델 몬테> 추기경(후에 <쥬리어스> 3세 교황)과 <말쎄루스 쎄르비니> 추기경(<말쎄루스> 2세) 및 <레지날드 포올> 추기경이였다.
교부들은 처음 4개월 동안은 공의회를 조직하고 사업계획을 수립하는 데에 소비하였다. 공의회가 이때와 같이 막대하고 심각한 문제에 직면하기는 전에 그 예가 없었다. 황제 (<챨스> 5세)는 공의회가 계률(戒律)과 교회 개혁의 문제만을 취급하기를 주장하였고 「프로테스탄트」와 불화를 초래할 문제토의는 원하지 않았으나 <파울> 3세 교황은 이 요구를 강력하게 반대하였다. 교황은 참다운 신앙을 명확히 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한 문제이며 교회개혁은 「성청」에서 조절될 수 있는 것이라고 강력히 주장하였다.
격렬한 논쟁이 일어난 결과 교부들은 타협안(妥協案)을 채택하였다. 그들은 「도그마」(교리)를 확고히 할 것을 제의하였고 「파리 팟수」 계률을 건설하게할 것을 제의하였다.
교황은 그것을 인가할 것에 납득은 갔으나 신앙 문제에 우선권이 주어져야 한다고 하였다.
황제는 하는 수 없이 마지못해 그것에 동조하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