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 특파원이 본 한국교회 학교실태
아직도 유년기
발행일1961-08-20 [제291호, 2면]
【서울=NC 통신특파원 버그神父 記】 한국에서의 가톨릭 교육은 국가로부터 하등의 재정 원조를 받지 못하고 있으며 아직도 유년기(幼年期)에서 머뭇거리고 있다.
UNKRA(유엔 한국 부흥위원단)로부터 원조를 받는 반면 주한미8군이 후원한 「한국 군사원조계획」(AFAK)과 같은 단일 기관으로부터도 크나큰 원조를 받아왔다.
교회는 1953년 7월 한국전쟁 이후 대한민국 안에 함축성(含蓄性) 있는 교육 「씨스템」을 세우려고 결정적인 노력을 경주하여 왔다.
오늘날까지 7개의 국민학교와 중학교, 24개소, 고등학교 19개소, 단과대학들 및 종합대학 하나를 세웠다.
한국 내 9개 대목구의 각 교구는 자체의 가톨릭 학교를 건립할 수 있었다.
지금은 지방 신자나 해외 전교협회에서 갹출한 것 혹은 선교사 개인적으로 자기 모국의 친구들로부터 걷워들인 것 등으로 유지되었다.
오늘날 한국에서는 국민학교 교육은 의무적이며 또 자유적이다.
교육 구조는 미국의 그것과 매우 흡사하다.
그러나 서구화(西歐化)된 「씨스템」은 비교적 새로운 것이다.
약 1세기 전 「이조시대」로 알려졌을 때의 한국은 외국인을 환영하지 않았고 교육 「씨스템」은 몇 세기나 묵은 중국 고대 「씨스템」을 그대로 받아들였었다.
1976년에 한국의 문호가 개방됨으로써 서구라파 사상이 이 나라를 침투하기 시작하였다.
「일본」은 구제 교육을 폐지하고 서구식 교육을 도입하여 이때에 가톨릭 교육을 도입할 수 있었으나 당시는 국내에 가톨릭 신자가 너무나 적었고 교회의 필요성조차 탐탁치 않았었다.
그러나 몇몇 선교사 신부들은 자비로 학교를 세우고 더 많은 가톨릭 학교를 세우려고 노력하였으나 한국 내에서의 여러 사건으로 인하여 이것이 극히 부진상태에 놓였었다.
1920년부터 1945년까지 「일본」이 한국에서 교육 「씨스템」을 지배한 후 일본식 교육 사상에 따르도록 강압하였고 이에 반대한 사립학교는 교문을 닫게 되었다.
1945년에 한국이 8·15 해방을 맞이하여 미국 군정(軍政) 당국은 새로운 교육체계를 채택하였다.
그것이 현재까지 사용되고 있는 6·3·3·4 교육 「씨스템」이다.
그러나 새로이 채택된 교육 「씨스템」이 완전한 기능을 발하기도 전에 한국전쟁이 발발하였다.
전쟁을 통하여 국내학교의 72%가 완전히 또는 대부분이 파괴되었다.
지난 7년동안에 급격하게 증가하는 가톨릭 인구로 인하여 가톨릭 자녀들이 취학한 가톨릭 학교의 증가요구가 드높아갔다.
이와같은 요구에 직면하여 각 교구는 자체의 학교를 가지기에 노력하게 되었다. 사실상 대부분의 한국내 가톨릭학교는 1953년의 휴전 이후 세워진 것이다.
수도회나 전교협회에 세운 학교는 UNKRA로부터 교과서와 비품을 위한 원조를 받고 있다.
주한 미8군에서 후원하는 「한국군사원조」 계획은 수많은 학교, 교회, 고아원, 건강진료소 및 또다른 기타 계획 등을 원조하였다.
가톨릭 학교나 비가톨릭 학교도 다같이 이 원조의 혜택을 받았다.
1954년에 시작된 동 계획이후 건물 자체만 해도 1천3백만 「딸라」가 공급되었다.
비근한 예로 「예수회」에서 처음으로 한국에 가톨릭 종합대학인 「서강」대학을 건립할 때에 군사원조 기관은 1만포(萬包)의 「쎄멘트」를 제공하였다.
한국에서 남자학교를 세워 교육사업에 이바지하고 있는 수도회 및 전교협회는 미국 「위스콘신」구의 「예수회」 이태리의 「사레지오」회 서독 「바바리아」의 「분도회」 미국 「메리놀회」 아이렌드의 「콜롬바노」 신부회 및 불란서 「파리」 외방전교회이다.
한편 「태평양」 지구의 「마리아니스트」는 1962년에 학교를 개교할 것이다.
또한 여자학교로는 「성심회」 수녀회 이태리의 「사레지오」 수녀회 「샤르뜨르」의 성 <바오로회」 수녀회 및 「마리아」의 「바잊거」 선교회이다.
한국에 있는 외국인 주교들은 원조를 얻는데 있어서 모국의 친구나 가톨릭 기관에 많이 의존하고 있고 한국인 주교들은 해외로부터 원조를 얻고 있으나 대부분은 그들 자신의 가톨릭 신자와 「로오마」에 있는 「포교성성」(布敎聖省) 「포교협회」 및 다른 가톨릭 단체로부터의 기증에 의존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