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史(사)를 만든 사람] (11)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발행일1961-08-20 [제291호, 2면]
■ 생애
「프로테스탄티즘」의 창시자(創始者) 1483년 11월10일 광부(鑛夫) <한스 루터>를 아버지로 하여 「독일」의 「아이스레벤」에서 출생.
어려서부터 엄격한 교육을 받고 「마그데부르그」의 주교좌성당 학교왕 「에르후르트」대학에서 연학 1505년에 자유과목의 박사학위를 획득하고 법률학을 연구했다.
1505년에 수사로 서원하여 1507년에 「오그스틴」회 사제로 서품됐다.
「윗덴베르그」 대학에서 도덕가아좌를 강의하고 윤리학을 가르치는 동시에 신학을 계속 연구했다.
1512년 10월에 신학박사 학위를 획득.
1520년에 「이단」(異端) 유포죄로 파문당하고 1525년에 수도복을 스스로 벗고 「사도회」 수녀 <가타리나 보라>와 결혼.
1546년 2월18일 사망.
■ 사상
<루터>는 <아리스토테레스> 학설의 종교문제에의 응용과 「아리스토테레스」 자체 및 「스코라」학설 전반을 반대하였다.
그리하여 <오그스투스>의 「원죄」 「욕정」 「성총」 「공덕」 「예정」(豫定)에 관한 명제(命題)와 천주 앞에서는 인간이 전연 무(無)하다는 신비사상(神秘思想) 및 자기자신의 영적 경험으로부터 성서적(聖_的)인 천주의 피조물(被造物)의 활동에 대한 협력에 대치하는 천주만의 단독활동 등의 교설(敎說)을 세웠다.
인간의 본성은 영세받는 후에도 죄로 인해서 타락되어 있고 욕정(慾情)은 극복하지 못하며 인간의 의지는 이것에 대하여 벌써 자유를 잃어버렸고 구령(救靈)을 위한 어떠한 투쟁도 무익(無益)하다고 하였다.
더욱이 <루터>는 신뢰적 신앙(信賴的信仰)에서부터 그리스도교도의 구령의 확실성이 생긴다는 가설(假說)을 세우고 이 가설이 그에게는 「복음」(福音)이 되었다.
따라서 그는 교회가 「미사」나 비적(飛迹=聖書) 사제직이나 계급제도에 있어서 나타나는 천주와 인간과의 인간적 중개(仲介) 일체를 부인하였다.
그리하여 <루터>는 전례(典禮)와 규율(規律)을 개혁하고 사송(私誦) 「미사」 「고해」(告解) 「단식」을 폐지하고 주일 제식(祭式)을 「라띤어」로 제복과 전례의식을 사용하는 것을 완전히 폐지하였다.
특히 「로오마」에의 헌금(獻金) 독신제(獨身制) 순례 신심회 징계벌(懲戒罰)을 폐지하고 축일을 폐지 또는 주일과 합하고 교회법 특히 교황법령을 개폐(改_)하였다.
■ 비판
1520년 6월6015일의 대칙서(大勅書) 『엑스루게 도미노』는 일간의 무능력 신앙 성의(成義=뜻을 부여하는 것) 성총 비적(秘蹟) 계급제도 연옥(煉獄)에 관한 <루터>의 41명제(命題)를 일부는 이단(異端)임을 해명하고 일부는 오류(誤謬)라 지적했으며 신자의 귀를 상하게 하고 오도(誤導)의 두려움이 있고 또한 가톨릭 진리(眞理)에 위반되는 것으로서 배척하고 그를 파문(破門) 선언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