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안이 그리스도-아닌줄을 고명하고… 나는 광야에서 「주의 길을 닦으라」하는 소리로라』 (요왕 1장 20,23절)
<요안> 세자는 자기를 그리스도로 의심하고 또 무엇하는 사람인지 알고저 하는 사람들에게 조금도 숨김없이 자기는 그리스도가 아니고 주의 길을 닦으라 하는 소리라고 대답하셨읍니다.
그 시대 「유데아」 사람들은 <요다>지파(支派)에 망국(亡國)과 같은 여러가지 표를 보고 그리스도께서 곧 오실 것이라고 믿고 있던 차에 홀연 광야에서 나타난 <요안>을 보고 그리스도가 아닌가 의심하였읍니다. <요안>의 옷차림이나 먹는 것은 산골 무식한 사람같이 보였으나 그러나 그의 말이나 태도에서 나타나는 지혜나 박학함에 더욱이 강론을 효과있게 하고 사람들이 지켜야 할 합당한 법을 말하는데는 크게 놀랐으며 또한 심각한 토론을 하게 되었읍니다. <요안>은 그들의 물음에 대답하여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고 또 <엘리아>도 아니며 선지자도 아니라』고 하시고 또한 그리스도가 아니라는 것을 믿게 하기 위하여 『그리스도는 이미 오셨고 나 보다 초월한 자로 나는 그 신끈을 풀기도 합당치 못한 자라』고 말씀하셨읍니다. 사람들이 자기를 그리스도로 생각할 때 나는 그리스도의 종노릇 하기도 부당하다고 말씀하신 것은 그리스도의 높으심을 크게 나타내는 것이고 또한 『저 -나보다 후에 오시나 나에서 초월하신 자』라고 말씀하신 것은 비록 인간적 출생으로는 자기가 먼저지만 저는 영원무시로부터 성부께 낳음을 받은 자로 참천주시고 참사람이시라는 것을 훌륭히 가르쳐주신 것입니다.
<요안>은 그리스도가 아니라는 것을 말씀하신 다음에 자기의 직책을 명시하여 『나는 광야에서 주의 길을 닦으라 하는 소리』라고 말씀하셨읍니다. 소리는 말하는 것이 전임무인 것과 같이 <요안>은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것이 직책이었읍니다. 그러므로 아내도 집고 던답도 없이 오로지 그리스도를 드러내고 그를 맞이하기 위하여 사람들을 준비 시키는데만 전력을 기울였읍니다.
그러나 스리스도를 전파하는 소리 <요안>은 혀로만 말씀하지 않으시고 옷으로 음식 등으로도 말씀하셨읍니다. 소리가 정신적 개념 즉 말의 외적 현상인 것과 같이 소리인 <요안>은 말씀인 그리스도와 극히 비슷하였읍니다. 그리스도께서 강생하실 때 <갑열> 대천신의 보함을 받으심과 같이 <요안>도 그러하셨고 그리스도께서 일생을 영혼구령을 위하여 바치신 것과 같이 <요안>도 그러하셨으며 그리스도께서 무죄한 자로 인류를 위하여 죽으심과 같이 <요안>도 무죄한 자로 정의를 위하여 죽으셨읍니다. 무릇 남을 가르치고 자녀를 키우는 자도 이와같아야겠읍니다. 물론 피교육자에 대하여 해야할 것을 일러주고 잘하기 위하여 격려도 하고 잘못했을 때는 징계도 하여야겠지만 그러나 잊지 말아햐 할 가장 중요한 것은 표양입니다. 행실이 좋으면 말이 없어도 은연중에 따르게 됩니다.
<바오로> 종도의 『나 그리스도의 표양을 따른 것 같이 너희는 내 표양을 따르라』고 하신 말씀을 명심하여 저들을 표양으로 비추고 말로 다루어 선의 길로 인도하여야 겠읍니다.
<요안>은 또한 광야에서 말씀하는 천주의 한 도구로서 자기말이 아니라 천주의 말씀을 하셨읍니다. 그러므로 천주께서는 <요안>을 통하여 혹은 은혜를 약속하시고 혹은 벌로 위협하시는 등 몇백가지 모양으로 말씀하실 수 있었으며 듣는 자들의 마음에 천주께 대한 사랑을 이르킬 수 있었읍니다. 남을 교육하는 자도 <요안>과 같이 천주의 나팔로써 천주께서 원하시는 것을 말하고 조금도 자기웅변이나 지식에 대하여 찬양받기를 삼가야겠읍니다. 그리고 마귀가 피조물을 통하여 사람들을 악으로 이끄는데 온 힘을 쓰듯이 같은 피조물을 통하여 선으로 인도하는데 잠시도 쉬지말아야겠읍니다.
<요안>이 광야에서 강론할 때 듣는 사람은 많지 않았읍니다. 이는 군중가운데서가 아니라 광야에서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옛날 천주께서는 <요세아>에게 『나는 저들(이스라엘)을 꾀여 광야로 이끌어 그곳에서 저들 마음에 말하겠노라』고 말씀하셨읍니다. 그런즉 우리도 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히 천주께 기구하여야겠읍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시간이 없다고 할지 모릅니다. 그렇지만 원한다면 시간을 만들 수 있읍니다. 사람이 영혼과 육신과 일을 가질 때 하루의 시간을 삼등분하여야겠읍니다. 그러나 육신의 나약함을 생각해서 육신에 열두시간 일하는데 열시간 그리고 영혼을 위해서는 두시간을 위해서는 두시간을 분배합시다. 만일 영혼을 위하여 두시간이 많다면 두시간의 절반인 한시간 또는 그보다 짧은 조·만과 묵주신공 그외 약간의 묵상신공을 할 수 있는 시간을 분배합시다. 물론 의롭지 못한 분배입니다. 그러나 이것도 할 수 없다면 영혼을 가지고 있다고 자칭할 수 있을는지요? 세상의 것을 사랑함에 취한 자가 반 시간도 천주께 봉사하지 않고 행복스럽게 살고있을 때 천주께서는 당신의 큰 자비심으로 병이나 사업의 실패나 재물의 손실 같은 불행을 가져오게 함으로 광야에로 부르십니다.
그러므로 광야에 가기 싫어할 때 광야는 우리에게 오고 또한 그때에 귀가 열려 천주의 말씀을 듣게됩니다. 역사를 보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천주를 멀리하다가 사형장에서 또는 그외 재앙을 당할 때 천주를 다시 찾았는지 모릅니다. 이는 「이사이아」서에 『너희가 듣는 바를 깨닫게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재앙뿐이다』하신 말씀을 맞게하는 것입니다. <끝>
李啓重(요안) 神父