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포] (77) 舊馬山(구마산)본당
새 의욕 실은 舊馬山
김영근 前 會長 공은 정말 커
발행일1961-08-20 [제291호, 3면]
한국 최남단의 항구도시이며 3·15 부정선거에 항거하여 피흘린 선봉도시인 마산.
들끓던 도시가 지금은 너모나 조용하다.
뒤에 높은 산을 등지고 앞에 바다를 바라보는 마산본당은 이고장 신자들의 정신적 등대(燈台)인 동시에 지리적으로도 등대역할을 하고 있는상 싶다.
인구 30만 미만의 대도시(?)이면서도 파도소리와 통통선(船)의 기동소리 외에는 별로 소음(騷音)을 느끼지 못하는 조용한 항구도시라는 인상을 주는 이곳 마산은 본당 건물마저 대조적으로 조용한 품격을 지니고 있다.
구지 「흠」을 잡으려면 성당 앞뜰이 너무 좁다고 할까.
이 본당은 해방 15년 전에 본당설립 기성회가 발족되었다.
1936년에 신마산본당에서 당시 교우수 불과 50명 남짓을 이끌고 분리되었다. 이 해로부터 본격적인 성당 구축기성회 활동이 시작되어 해방 이듬해에 현재 본당자리의 이롭ㄴ인 가옥을 매입하여(당시 70만환) 감격적인 첫미사를 올렸다.
1952년에 대망의 초대 본당 주임 고 <요셉> 유(柳景喜) 신부를 맞아 창고 하나를 추가 매입아여 또다시 현재의 사제관까지 확보하고 난 후 유신부는 그 만 세상을 떠났다.
떠나신 초대 주임의 뜻을 이어받은 <아오스딩> 김(金俊弼) 신부는 1956년에 부임하여 이때부터 현 성당 건립의 첫 「함마」 소리가 울릴 단계에 들어갔다.
당시의 본당 회장 <도마> 김영근씨는 기성회를 새로 조직하여 1천7백50만환에 건립 계약을 체결하고 주야로 공사 진행에 박차를 가하였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본당주임 김신부님이 불의의 병환으로 일단 공사가 중지상태에 빠지사 <도마> 김회장은 개인적으로 나머지 공사를 부담하_ 1958년 8월15일 성모몽소승천날 드디어 완성을 보았다(총 공사비 2천6백만환) 공사 중에 일어난 건설 꺼리가 될 이상한 사건이나 또는 수많은 난관을 돌파하여 현재의 성당을 완성한데는 실로 김회장의 물질적 희생의 보람이 크다하지 않을 수 없다.
그 후에 곧 현 수녀원 건물의 낙성을 보고 본당으로서의 면목을 완전히 갖추었다.
1960년 10월10일 본당 건립에 절대적 공적을 남긴 <아오스딩> 김신부의 은경축을 맞이하여 그동안의 노고를 위로할 틈도 없이 곧 새 본당주임 현 <모이세> 김(金成道) 신부가 부임하여 왔다.
광주교구에서 「레지오 마리에」 운동의 전문가(?)이며 많은 경험을 쌓은 <모이세> 신부는 우선 부임 시초부터 「레지오」 활동에 주력을 주었다.
현재로는 부산교구서 남지구를 통할하는 「꼬미시움」을 비롯하여 7개의 「꾸리아」 많은 「쁘레시디움」을 거느린 대 「레지오」본당으로 등장하게 되었다.
다섯자 남짓한 단구(短軀)에 열성의 총열이 빛나는 눈동자를 가진 <모이세> 신부는 본당 업무의 통수자인 동시에 동물 애호가이기도 하다. 새 본당회장 안호성(安浩承)씨의 불철주야한 보좌를 받고 이욕적인 발전단계의 이 본당의 현재 활동하는 단체로는 「레지오 마리에」를 위시하여 「성모회」 「요셉회」 「학생회」 등이 있고 앞으로 조직될 가장 유망하고 강력한 단체로는 「청년회」를 구상하고 있다.
특히 <모이세> 김신부는 가톨릭 출판물에 특별한 관심을 기울여 출판물을 통한 전교와 그 보급에 힘쓸 것이라고 다짐하며 성교회의 앞날을 질머질 청년들의 지도와 가톨릭 문학 육성에 양면작전(?)을 쏠 것이라고 그의 포부를 피력하였다.
마산본당의 상징(?)인 사슴 두 마리의 재롱을 뒤로 남기고 기자는 신부회장들과 작별했다.
(世)