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國政治(미국정치)서 云謂(운위)되는 反(반)가톨릭의 根源(근원)
타종교 증가로 불안
「유대」인도 학대
프로테스탄트(공화당) 가톨릭(민주당) 대결
발행일1960-12-11 [제258호, 4면]
(基 4)
남북전쟁 후 십년간 「원주민」 대잔체는 자기들의 공격목표를 「유대」인에게까지 확대시켰다. 독립선언때까지만 하드라도 이 지방에는 불과 수천명의 「유대」인만이 거주했을 따름이다.
1880년에 이르기까지 반유대인 운동이 미국내에 세차게 지속되었다.
이때는 바로 「유대」인들이 「구라파」에서 연쇄적인 재난(災難)을 당하고 있었다.
즉 「로시아」 내에서의 전제주의자(專制主義者)들에 의한 「유대」인 학살(虐殺), 「독일」에서의 <비스마아크>의 초국가주의(超國家主義), 「불란서」에서의 <드레피스> 사건 등으로 인하여 세계 제1차대전 후까지 미국내로 이주해온 「유대인」의 수는 1백80만에 달하였다. 이들이 지니고 있는 종교 또한 원주민들에게는 일대 종교 위협이 아닐 수 없었고 또 하나의 외방인 취급으로서 이들에 대한 공격을 강화하기 시작했다.
가톨릭에 대한 정치적 편견에 못지 않게 「유대」인에 대하여도 극단적인 편견을 표시한 것은 말할 것도 없으며 전체 식민지를 통하여 대부분의 우세한 「프로테스탄트」의 교파나 타종교로 인해서 위협을 당하는 기미조차 보였다.
대문에 이들에 대하여 욕설을 퍼붓지 않는 자는 없고 초기 식민지 시대의 「친우협회」(親友協會)나 「퀘에커」교도에 대한 것보다 더한층 증오의 대상으로 취급하였다.
공화당이 창설된 지 오랜 후에도 그들은 애국정신의 기준을 종교적 평화주의의 성립 여부와 결부시켰다.
이런 시기에 있어서는 「퀘이커」 교도인 <하바드 후버>씨가 대통령으로 선출되고 군(軍)의 최고 통수자가 되리라고는 상상하기조차 힘든 일이었다.
그러나 「프로테스탄트」의 대항과 팽창한 「유대」인 인구의 새로운 요소(要素)에도 불구하고 19세기를 통하여 미국 내 「종교문제」는 정치적으로 가톨리시즘주의를 주로 맵돌고 있었다.
이때에 대부분이 가톨릭신자인 대대적 이민이 또 밀려닥쳤다. 그들은 주로 도시에 정착하여 정치적 조직에도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고 드디어는 「뉴욕」민주당 조직 모체인 「탐마니 홀」을 구성했다.
1882년에 가톨릭 평신도들은 공제조합(共濟組合=일종의 비밀결사)을 창설하고 그 이름을 「코롬브스의 기사(騎士)라 하였다.
세력이 저하일로에 있던 「모른다」당에게는 이것이 일대 타격이 아닐 수 없었고 그들은 이 조직을 가르켜 「교황 근위병」이라고 일커렀다. 「프로테스탄트」들은 자기네들에 대한 위협을 「카바」하기 위하여 『미국인 보호연맹』이라는 비밀결사를 또 조직하였다. 이것은 마치 「모른다」당과 같은 성질의 비밀결사로서 APA라고 알려졌다.
이들은 주로 중서부와 서부에 세력을 펴고 70종의 반가톨릭 선전 주간지를 발행하고 의회에 20명의 의원을 보냈다. APA는 비록 종파적인 정체에 선봉으로 나섰으나 정치단체는 아니었다.
그러나 사실상 이때의 가장 중요한 반가톨릭 정치의 「에피소드」는 그들의 활동이 아니라 철저한 반가톨릭투쟁가인 <사무엘 버챠드>를 「뉴욕」 장로교 회장으로 임명한 사실이다.
다음해의 선거전에서 <버챠드>씨는 가톨릭신자를 모친으로 가진 민주당 후보 <브레인>시에 대항하여 『우리들은 공화당원이다. 당을 떠날 생각도 말 것이며 술(람)과 「로오마」주의 및 반란에 대항하는 선봉자로서 당과 운명을 같이하라』고 선언하였다.
이라하여 「술」 「로오마」주의 「반란」이 공화당의 선거 구호가 되었고 동시에 가톨릭 공격의 표어가 되었다.
결과로 민주당의 <브레인>씨는 가장 가톨릭 인구가 많은 「뉴욕」주에서 약1천표차로 낙선되었고 공화당의 승리로 끝났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