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칸디나비아」 旅行斷想(여행단상)
발행일1960-12-11 [제258호, 4면]
오랫동안 계획하던 「스칸디나비아」 4개국을 향하여 서독 「엣쎈」을 떠난 것은 10월 7일이었다. 우선 「뮨스터」에 들려 E가족들과 만나고 K신부와 이향(異鄕)에서 오래간만에 주고받은 귀익은 한국목소리!
다음날인 10월 8일은 「함브르그」까지 가기로 했는데 「뮨스터」역에서 북행(北行)기차를 기다리는 한시간의 다방(茶房) 이야기는 좋았다. 물론 한국사람끼리의 인정이 통하는 시간이었으니까.
<비스마르크>씨가 자유항(自由港)을 만드는데 공로가 있었다는 「함브르그」의 역에 내렸으나 어디에서 어떻게 헐값으로 먹고 자느냐가 뚜렷해지지 않았다. 그누가 나를 기다리는 것도 아니오 그렇다고 해서 내가 거리낌없이 문을 두드릴 수 있는 아는 사람도 없다. 그래서 우선 가톨릭교회의 문을 두드리게 되었는데 본당신부님을 뵈옵고 사정 이야기를 했더니 친절하게 『마리엔 하우스』란 집으로 가게해주셨는데 가보니 고아들을 기르는 수녀원이었다.
「함브르그」에 들리게 된 것은 「놀웨이」와 「핀랜드」 입국 「비사」(査證) 신청을 하는 것과 남는 시간을 이용해서 자유항시가를 구경하자는 것이었다.
10월 9일 이날은 주일임으로 영사관(領事館)에서 볼일은 내일 보아야 하니까 오전에는 시청(市廳)과 미술관(美術館)과 「알스터」호수(湖水)를 구경하고 오후엔 항구(港口)를 보았는데 저녁때에 불빛으로 장식된 「함브르그」 항구는 우선 그 웅대함에 있어 취미가 붙었다. 왕년(往年) 한시절엔 「유럽」 북쪽을 제어(制御)하던 국제무역항(貿易港)으로서 그 이름을 떨친 곳이었으며 지금도 재건(再建)된 서독의 국력(國力)을 여실히 볼 수 있는 무역항임엔 틀림없다. 어쩌면 이렇게도 강한 생활력을 가진 민족일까? 모든 것을 잿덤이(灰)로 남긴 그때가 바루 15년전인데 오늘의 서독은 의심할 여지도 없이 「유럽」에서 제일인 것이다. 물론 미국의 원조가 바탕이 되었지만 무엇보다도 먼저 독일민족의 정신과 단결과 근로(勤勞)와 지성적(知性的) 두뇌의 소산일 것이다.
「코펜하겐」으로
10월 10일 오전엔 각국 영사관을 찾아 「비사」를 얻었고 오후2시차로 「코펜하겐」 즉 정말(丁抹)을 서울로 달렸다. 범11시 알음도 없고 말고 통하지 않는 「코펜하겐」 중앙역(中央驛)에 도착했을 때는 좀 곤란했다. 혼자 걸어나와 가톨릭교회를 찾았는데 난데없이 나타난 두 청년이 유달리 친절한 영어로 『우리가 가톨릭교회를 아니 따라오라』는 것이다.
한편 편리하게 된 것 같고 또 한편으로는 불안하기도 했다. 그들의 태도나 말씨가 아무래도 고상하지 못했기 때문에 어쩐지 기분이 나빠졌다.
한참동안 거닐어서 교회를 찾기는 했지만 밤중이라 아무런 연락도 않되었다. 내가 교회를 찾은 것은 사실은 오늘 밤을 위한 것이 아니오 내일 아침 「미사」성제부터의 걱정을 덜기위한 것이었는데 겨우 이런 두 사나이를 돌려보내고 혼자 「사보이」라는 여관을 찾아갔다.
10월 11일, 여관에 숙박료를 지불하고는 곧 가까운 곳에 있는 교회로 갔다. 『성모님제대』에서 「미사」를 올린 다음 본당신부님을 만날 수 있었는데 그 신부님은 독일출신 예수회원이었다. 사정을 밝혔더니 곧 전화로 연락을 해서 내가 있을 곳을 찾아주셨으므로 「코펜하겐」에서의 잠자리는 방과 밥먹는 것은 해결된 셈이라 이젠 안심하고 거리를 산보할 수 있었다.
시청(市廳)과 박물관을 구경했는데 박물관에선 퍽 재미있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북극지대 생활을 보여주는 수집품들을 진열한 것인데 「에스키모」의 생활도 엿볼 수 있었다. 희게 쌓인 눈(雪) 위에서 살고 있는 그들의 옷을 상상해보시라 털모자에서부터 가죽신발까지. 그리고 임금님들의 별궁(別宮)인 『그리스디안 보로히』도 보았다.
10월 12일, 오전에 「아메엘리엔 보르히」 왕궁(王宮)을 찾았다. 보초의 옷치장이나 근무상태는 「로오마」의 교황궁에 보는 또는 영국 「런던」 왕궁 앞에서 보던 것과 흡사하다. 얼핏 생각하면 민주주의적인 면이 적은 것 같기도 하지만 사실은 질서있는 민주주의를 실천하고 있는 것이 「유럽」왕국들의 실상이다.
왕국을 구경하고는 바닷가에 있는 『작은 바다의 처녀』를 보았는데 다른게 아니고 바닷가 바위에 조각한 어린 소녀 상(像)이다. 무슨 근사한 이야기가 있는지는 모르지만 하여간 특수한 미술적 「아이디어」로써 이루워진 것만은 아무라도 느낄 수 있었다.
『로오젠보르히』라는 옛날 왕의 별궁으로 가보았다. 왕관(王冠)들을 진열해 놓은 것을 보니 경주(慶州) 금관(錦冠)이 회상되었다.
다음은 식물원(植物園)을 보앗는데 이름들은 잘모르나 여하튼 모든 종들의 식물들이 있었으며 열대(熱帶)지방의 식물을 재배하는데는 굉장한 힘을 드리고 있었다. 과학적으로 열도(熱度)와 광도(光度)와 수분(水分)을 계량(計量)해 주어야 하니깐.
10월 13일 「코펜하겐」에서 30「키로」 가량 떨어진 「로스킬데」로 나가보기로 했다. 중세기(中世紀)부터 이름있는 주교좌(主敎座)성당이 있고 그 성당 안에는 많은 임금들의 무덤(墓)이 있다.
「로스킬데」까지 가는 도중 농촌생활의 일부를 엿볼 수 있었는데 『농민의 이상적인 나라』로서 세계에 알려진 「덴마크」(丁抹)인지라 과연 훌륭한 전원생활(田園生活)의 표정이었다.
10월 14일, 다시 국립박물관을 ㅊ자았는데 박물관을 잘보는 것이 돈 적게 드리고 남의 나라를 구경하는 방법이니깐.
한국 물품이 있다고 진열물품목록에 기록되어 있기로 꼭 한번 보곺았다. 그러나 진열실(陳列室)이 잠겨있으므로 사무실에 가서 문의해본 즉 특별 연구가들이 하두 많으니 담당현구가를 만나야 한다는 것. 사무실에서 기다리고 있으니 담당자가 돌아왔다. 『당신이 한국사람이냐』고 묻기에 『그렇다』고 했더니 『나도 한국에까지 간 일이 있다』고 하면서 반가워했다. 『어디에 언제 가셨더냐』고 물으니 <이승만> 대통령시대에 서울을 가보앗다는 대답 『당신은 어디서 왔느냐』고 하기에 웃으며 『한국의 마르세이유』라고 답했더니 그도 웃으면서 아, 부산이로군』한다. 한국물품이라고 진열해둔 것을 보앗는데 흐늘한 옷가지 등 어떻게 시시한 것만 갖다놓았던지 보기에 창피했다.
하기야 우리들의 탓일 것이다. 이런 것을 볼 때마다 느끼는 일이지마는 다른 나라와 비교할 수 있는 박물관이라 더욱 섭섭했다.
박물관을 나와 「벨트우어」(世界時計)를 보았는데 『세계 어느나라에서는 지금 몇시냐』는 질문에 모두 답해주는 복잡하고 큰 시계이다. (다음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