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티」 선물교환 위한 「크리스마스」 아니다
발행일1960-12-18 [제259호, 1면]
그리스도를 맞이하여 자유를 얻으라
「크리스마스」는 역사적 사실을 기념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탄생과 생애와 죽엄은 모든 역사의 가장 중요한 사실로서 오랫동안 간주되어왔다.
인간의 여러사건에 관하여는 예수 탄생의 사실을 입증하기 위하여 목동과 왕들이 찾아오고 복음전도자들이 「베트레햄」에서 시작한 생활과 생애의 절정인 죽엄에 대하여 상세하게 기록한 이우에는 결코 이와같은 일이 없었다.
그리스도는 어린 시절부터 논쟁의 중심이었다.
<헤로데>는 정치적 「라이발」로서 그리스도를 두려워한 첫째로 기록된 인물이며 그후에도 수없이 이와같은 두려움이 많았다.
그리스도를 섬긴다는 것은 참된 신(神)으로서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대하여 전적으로 충실한다는 것을 의미하고 혹은 삶의 도덕적 방법으로서 그의 가르침을 믿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리스도 자녀로서의 지도자들은 그리스도에 관하여 서로 분리되었다.
어 떤자는 그리스도를 섬기게 되었고 또 다른자는 그리스도의 교리와 싸우게 되고 그들은 그리스도를 높이 찬양하고 혹자는 그를 조소(嘲笑)하였다.
우리들은 그리스도에 관한 이와같은 분렬이 지금 아직도 날카롭다는 사실에 새삼 놀랄 필요는 없다. 그리스도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가르치심을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크리스마스」날 「말구유」 앞에 무릎을 꿇는 자는 누구라도 그것이 무조건 믿음의 행동이어야 한다. 말구유를 떠나 몇일이 지나고 난 후 사람들은 말구유가 지니고 있는 참뜻을 받아들여야 하거나 혹은 부정한다. 만일 당신이 그것을 부정할 것 같으면 그것은 영원히 계속되는 「진실」에 대한 당신 자신의 손실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또 만일 당신이 그 뜻을 섬긴다면 당신은 보다 나은 이해를 위한 모든 다른 「인간진리」를 개방할 수 있는 자유를 얻는다는 것을 아라야 한다.
그리스도의 가르침이란 생활의 방법이다. 그리스도께서 가르치는 것은 지난날의 공상에 기초를 두는 것도 아니며 내일의 공론에 기반을 두는 것도 아니다. 천주께 뿌리박은 삶의 법칙이 있는 것이다. 고대 「유대아」에 있던 죄악은 현재 한국에도 지속되고 있다. 그러기 때문에 믿음을 가지고 있는 우리에게는 성탄이란 신앙의 고백이며 또한 우리의 죄를 사하기 위하여 천주의 아들이 인간으로 태어나셨다는 사실을 명언하는 것이다.
새해가 시작됨과 더불어 모든 신문들은 지난해 성탄 이후 전세계에서 일어난 여러사건 등을 추려서 소개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은 단지 홍수 이야기나 재난, 공포, 승리 및 과학의 업적 등에 끄칠 것이다.
그리스도에 대한 인간의 충실에 대하여는 주로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이 매해 중요점의 본질이 되기 때문에 나는 내가 그리스도에 종사하는 한 이와같은 평가(評價)를 갖는다.
「크리스마스」는 더욱 온화하고 화려하고 또한 서로 모이고 선물을 교환하고 「파아티」들을 갖는다. 그러나 진정한 성탄은 보다도 어머니 팔 안에 안긴 아기의 자연적 인력에 더욱 중요시해야 한다. 그것은 천주와의 약속의 사업이다.
그것은 우리들 가운데 있는 천주의 힘의 명시(明示)이다.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천주께 무릎을 꿇라는 명령이오 천주께서 지시하신 길을 따라 생활하라는 깨우침이다. 목적 없이 지내서는 안된다. 그것은 기구와 묵상의 시간이다. 내 영혼을 천주 안에 가까이 하고 온 가족이 그리스도의복음을 다같이 읽기 위한 것이다. 사하심을 받은 구세주에 감사하기 위함이오 지난해의 고마움을 감사하기 위함이다. 또한 앞으로 한해동안 그리스도의 진실안에 우리를 보호해 주도록 요청함이다.
이것이 곧 그리스도와 같이 지내는 시간이다.
그날의 즐거움은 예수 아기를 안고 그를 따라 십자가에 갈 수 있는 자에게만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