켄트배리 大僧正(대승정) 聖廳訪問(성청방문) 前後(전후)
공의회 準委員(준위원)들 事後交涉(사후교섭)에 猛活躍(맹활약)
英國(영국)에서는 大歡迎(대환영)
현실적 난관은 許多(허다)
一致(일치)위한 某種(모종)합의 성립?
결혼한대로 聖公會神父 再敍品
祭臺(제대)와 수도원도 빌려주고
발행일1960-12-18 [제259호, 2면]
최근 예루사렘 이스탄불을 거쳐 「로오마」로 「바티깐」 성청을 방문하고 <요안> 성하와 회견한 영국성공회 「켄트베리」 대주교 <휫셔> 박사는 자기의 공식방문에 관한 내용에 일체 언급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다시 교황 성하와 만나게 될 것이 멀지 않기를 바란다고 시사하였으며 영국의 신문들은 지난달 성청방문의 뜻을 공표했을 때와 같이 좌익계 신문까지도 일면에 대서특필하고 있다. 신문뿐만 아니라 이를 역사적인 사실로 또 갈려진 그리스도교인의 숭고한 형제애에서만 가능할 수 있는 과감하고 원대한 지도자적 도량을 각계에서 극구 찬양하고 있다. 영국에서의 종교개혁 이래 실로 「로오마」와의 직접 접촉은 이번이 처음인 것으로 이곳 성공회의 익명을 요구하는 고위성직자는 『이것이 곧 기적이며 인류의 평화를 더 지속시킬 지존하신 의향인 것 같다』고 했다. 이것으로 성청과의 우선 일종의 협약을 모색핬거나 혹은 직접 발표하지 않고 있는 그런 형식의 것이 실현되었으리라고 추측하기 어렵지 않다. 여기서 이 역사적 사실의 개념을 더듬어 보기로 하자.
정신적인 일치에서부터
모처럼 그것도 수백년만에 이루어진 「켄트베리」 대주교의 성 「로오마」 방문이 단순한 친선 혹은 정신적인 그 무엇으로만 돌릴 수 없고 가능한 합의가 구체적으로 성립됐을 것을 의심할 수 없으리라. 허나 성하와의 회견만을 비공식재인 것으로 또 그 내용은 앞서말한대로 전혀 알 길이 없는 것이다. 이를 역사적인 사실로 보는데 아무런 반대가 없을진대 거기 맞겨운 역사적 의의(意義)가 족히 있다고 하겠다. 아직도 두 교회가 재일치 하기엔 현실적으로 허다한 난관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교회 바깥 정세는 날로 그리스도교회의 유대를 시급히 촉구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 지도자가 앞장서서 형제적 유대의 본보기가 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제 우리가 교회의 뜻대로 적극적으로 「푸로테스탄트」 형제들과 즐겨 자리를 같이 하고 모든 사회악 및 정치적 현실문제에서도 공동으로 맞서 가기에 하등 주저 할 것이 없다. 이것이 지금 당장 규정할 수 있는 이번 쾌사(快事)의 가장 큰 뜻이라고 말할 수 있다.
난관은 없지 않다
영국성공회가 종교개혁의 소산(所産)인 것을 아무도 부인 못할 것이며 따라서 성질상 가톨릭과 다른만큼 가장 중요한 성사집행이 교환될 수 있겠는가? 이 한가지만으로도 근본적 차이를 매꾸어 볼 수 없다. 이런 사실은 성공회서도 인정한다. 그러나 그들은 오직 인간이 천주앞에 다만 양심으로서 대면할 수 있고 또 오직 천주만이 지극한 권위의 소재(所在)이니 어떤 땅위에서의 협력일치에 긍정적일 수 있다는 것이 그들의 견해이다.
여기 가톨릭은 천주 다만 교회 하나를 세워 성 <베드루>로서 그 열쇠를 맡겼으니 교회 재일치란 곧 본교회로 돌아옴을 뜻할뿐 교회는 언제나 하나요 거룩하며 종도로조차 내려올 따름이다. 그러므로 재일치의 뜻은 모교회(母敎會)로 돌아오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가톨릭이 아닌 교회는 가톨릭의 일원(一員)은 아닌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주목할 것은 이번 「켄트베리」 대주교는 그의 모든 발언(發言)에서 이 모든 사실을 난관으로서 시인하였으며 그런 난관을 극복하여 접촉의 길을 터 놓았다고 할 수 있으며 이는 오늘의 교회의 지도자들의 정성과 또 많은 기구의 선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까 이로써 적어도 서로 가능한 접촉을 해갈 길을 터놓은 셈이다.
과감한 지도자들
우리는 역사에서 위대한 지도자들의 행동력을 높이 평가할 수 있다. 그들은 한 시대를 능히 이끌어 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요안> 성하의 의향으로 비가톨릭과의 대공의회 연락위원회가 구성된 것은 지난 5월로 기억한다. 이 위원회를 통해 적극적인 섭외교섭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영국에서의 이 위원은 <히난> 박사와 <리봐풀> 대주교이다. 교회_이 성립되기에는 어떤 일에서도 그러하지만 상호 지향하는 바의 합의점을 잘 잡아야 하고 거기서 참으로 성실한 접근이 있어야 한다. 이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캔트베리」 대주교의 이번 움직임에 그 막후에 어떤 노력이 있었을 것을 상상키 어렵지 않다. <요안> 성하는 이미 「프랑스」 주재 교황대사로 외교의 역량을 발휘앴으며 특히 「에큐메니칼」(일치) 운동의 제일인자임이 틀림없다.
실은 「바티깐」 내에도 여기 지극히 보수적인 태도와 또 많은 의심을 들어내고 있는 최고위성직자도 없지 않다. 그러나 최종의 결정은 성하의 손에 있으며 전체 추기경회의를 능가하는 권한이 그의 수중에 있으며 그의 다하지 못하고 건강을 잃거나 서거할 때는 그 후계자가 반드시 그 못다한 일까지 계승하게 마련이다. 「프랑스」에서는 성공회 신부에게 제대(祭台)와 수도원을 빌려준 일도 있고 개종하여 재(再) 서품을 받은 신부(神父)가 결혼상태를 그대로 지속하는 등 세인(世人)을 놀라게 하면서 교리에 저촉이 없는 그 과감한 행동력은 범인(凡人)의 머리로 칙량키는 어려운 일이라 하겠다.
대공의회 앞두고
대체로 1962년 봄쯤해서 있을 대공의회를 앞두고 각 준비위원회는 이같이 실질적으로 움직이고 있다. 과거의 공의회는 교의를 선포하거나 이단(異端)을 규탄했지만 이번에는 교회의 재일치에 중점을 두고있다. 한편 교회안으로 가령 수도회의 수률(修律)을 현대화하고 전례문제 및 전례에서의 모국어 사용문제 특히 수도회의 바깥(世俗)과의 접촉 및 혼배 규정에서 몇까지 완화가 있을 것으로 본다. 이같이 교회 안으로서 중대한 개정이 기대되는 것이다. 허나 이런 개정과 교회 재일치와의 관련을 예측하거나 지극히 어려우며 또 앞서 논하기 위험한 것이라 하겠다. 대공의회를 목전에 두고도 이 한해가 저물기 전에 역사의 목격자가 된 것을 시원하게 여기는 바다.
한국에서의 전망
한국에서는 「프로테스탄트」 교세가 수적으로 우세하다. 해방후 교회 건립에 주력한 그들의 노력은 우방의 더많은 지원으로 산간벽촌에까지 복음의 종은 울린데 우리는 존경을 보내고 있다. 그러나 한국의 「프로테스탄트」들이 서구(西歐) 또는 미주(美州)에서와 같이 역사적인 그리고 사회적인 이념(理念)적 배경(背景)을 다시말하면 「프로테스탄티즘」을 확립하고 있다기보다 한 「밋숀」(전교)의 지역활동에 불과한 것이다. 이제 우리는 대(對) 「프로테스탄트」와의 몇가지 현실에 입각한 과감한 접촉을 「에큐메니칼」(교황 성하의 의향대로) 운동의 형식을 빌려 해나가야 할 줄 안다. 그 방법의 비근한 예로서는 대학생 「클럽」 안에 「크리스챤 유니티」 혹은 그런 연구회를 두고 교회사 교리 성서 등의 철저한 공부를 해가는 것이다.
이곳 영국의 「옥스포오트」에서와 같이 설명 있는 「미사」에 그들을 초대하고 단순한 회식(會食) 등의 교환도 유익할 것이다. 그러면서 우리는 그들과 함께 한국의 정치문제를 걱정하고 학원에서 또 일반사회에서의 터무니 없는 공산권에 유리한 중립론을 불지르고 있는 일등을 토론해도 좋을 줄 안다. 이것이 또한 이곳 특히 서독(西獨)에서 실행되고 있는 사실임을 보고(報告)하는 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