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國政治(미국정치)서 云謂(운위)되는 反(반)가톨릭의 根源(근원)
反(반)가톨리시즘 아닌 政爭(정쟁)
발행일1960-12-18 [제259호, 4면]
그러나 19세기 말서부터 20세기 초에 이르러 APA(미국인 보호연맹 「프로테스탄트」 비밀결사의 하나)의 세력은 점차로 약화(弱化)되었고 이와 때를 같이하여 미국내에 유력한 가톨릭교회 고위 성직자들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전 미국인의 가톨릭으로의 개종을 높이 제창한 「뉴욕」의 「죤 휴스」 대주교 「발티모아」의 <제임스 기본> 추기경 「쎄이트파울」의 <존 아이랜드> 대주교 등 미국사회에 절대적인 권위를 가져오는 여러 성직자들이 나타남으로서 가톨릭의 양심과 세력이 견고하게 뿌리를 박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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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에 미국 역사상 처음으로 가톨릭 대통령 입후보자가 나타났다.
그가 바로 「뉴욕」 주지사인 <알 스미스>씨이다.
「뉴욕」 주지사로 재선의 영광을 차지하고 있는 <스미스>씨는 강력한 당의 뒷받침과 가톨릭의 세력을 배경으로 하여 활발하게 선거전을 폈다.
그러나 이때에 나타난 것이 반가톨릭 운동의 역사상 가장 악랄(惡辣)했던 「쿠 쿠룩스 크란」(KKK) 단체의 조직이다.
이 반가톨릭 단체야말로 일찌기 미국내에 존재했든 여하한 반가톨릭 단체보다도 강력하고 적극성을 띄운 조직체라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세계 제1차 대전을 통하여 소위 「애국심」을 확장시키고 구라파에 대항하는 전후의 격변(激變)을 가져오게 하고 또 고립주의를 다시 지향하였다. 특히 이들은 「볼쉐비즘」의 공포와 사회주의 및 「외국인 사상」에 대하여 철저히 혐오하였다.
이들은 또한 「반-니그로」(黑人) 「반-외국인」 「반-유대인」 「반-가톨릭」 운동의 최선봉에 나섰다.
자기네들은 소위 「백% 미국인」(=순수)이라고 자처하였다.
<알 스미스> 선거전에 임한 그들은 그당시까지 회원 약 5백만을 포섭하고 있었다.
KKK단은 <알 스미스>씨의 대통령후보 지명을 방해하고 그것이 자기네들이 맡고 있는 「중대한 책임」이라고 주장하였다. 지방의 KKK단원들은 지방의회와 주입법부에 암암리에 압력을 가하고 급기야는 자기네들 세력을 그 안에가지 펴는데 성공하였다.
심지어 「인디아나」주의 KKK단 조직자인 <드라곤>씨는 『나는 「인디아나」주의 법률이다』라고 호언하기까지 이르렀다. 그들은 목적을 위하여는 살인과 방봐조차 감행하였고 급기야는 너무 지나친 이들의 폭행이 사회의 물의를 이르키자 그 조직도 차차 붕괴하기 시작하였다.
1928년까지는 이들 세력이 완전히 소멸상태로 되었고 <스미스>씨의 지명도 획득되었다.
KKK단은 음성적으로 지하공작을 꾀하고 반가톨릭의 화살을 변경하였다.
즉 그들은 행동적이 아닌 선전술로 가톨릭교도를 「사기꾼」이라고 공격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그들은 선전하기를 만일 <스미스>씨에게 투표하는 자는 종교재판깜이며 처녀가 부정행위를 감행하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극구 악선전하였다. 그 대표적인 선전기관지가 「아트란틱 몬트리」(월간지 태서양)이었다.
가톨릭 입후보인 <스미스>씨는 「탐마니 홀」을 중심으로 대도시에서 활발이 선거전을 전개하여 종교문제 논의에 대하여 지극히 태연하면서도 그 반가톨릭선전의 치열함에 비추어 결코 선거결과를 낙관하지 못하였다.
결국은 공화당 후보인 <허버트 후버>씨에게 패배하고 말았다.
패배의 원인은 단 가톨릭이란 이유때문인 것이다. 그의 종교가 「백아관」 주인을 뺏은 격이었다. 심지어 「텍사스」주의회의 <크리스웰> 박사는 「로오마 가톨리시즘」은 비단 한낫 종교만이 아니라. 정치적 조직을 가진 폭정주의(暴政主義)의 표본이다. 전세계에 걸쳐서 기본적 자유를 위협하고 유린하고 있는 조직체이다』라고 혹평하였다.
그러나 역사는 이제 달라졌다. 그렇게도 말썽많던 종교무네에도 불구하고 가톨릭인 <케네디>씨가 미국역사상 처음으로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종교와 국가는 분리된다는 그의 말이 과연 여하의 그의 재임중에 나타날 것인가를 우리는 크게 주목하고 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