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納凉(납량)] 長壽煙(장수연) 行商(행상)
발행일1961-08-27 [제292호, 4면]
6·25 동란이 일어나자 재빠르게도 전부터 친히 지내오던 모 대학생이 붉은 완장(腕章)을 두르고 집으로 올라와서 전하는 얘기가 자기는 마지 못해서 가면을 쓰고 동내 청년단에 입단하였다는 것과 통장이 청년단의 장이 되어가지고 날뛰고 있고 30분 후이면 나를 직접 잡으러 오겠끔되어 있으니 속히 피신 하라는 것이였다.
나는 이 젊은 대학생에게 감사하다는 사의를 표명하는 동시에 여기서 피해보았자 가라 곳도 없고 하니 하라는대로 할 수밖에 없다는 체념적인 답변을 하였더니 그러시다면 잠시 형편을 보고 올테니 기다리라는 것이다.
이 대학생이 나간 후 집안에서는 그래도 친구 집에라도 일시 피하라고 권하였으나 나는 이미 앞으로의 모든 문제는 호수천신에게 맡기기로 결심한 바 있었기 때문에 염려할 것 없이 마음들이나 안정하라고 하였다.
대학생이 다녀간 후 집에서 청년단 사무실을 내려다보니 벌써 동내 우익처어년과 인사들을 납치하여 다가 참아 들을 수 없는 언사와 행동과 구타를 하고 있었고 괴뢰군이 서울에 침입한 지 불과 2,3일 밖에 안되는데 어느 사이에 배웠는지 적기가 부르는 소리가 동내를 뒤흔들 다시_ 되어 있으니 참으로 그 보급력(普及力)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잠시 후 대학생은 다시 찾아와서 염려할 것 없다는 것이다. 이유인 즉 김구(金九)선생께서 서거하였을 때 대성통곡한 일이 있느냐고 묻기에 동내 유지들과 저녁때 석양주(夕陽酒) 한잔씩 나누다가 그러한 일이 전개 되었다는 사유를 말하였더니 자기는 서울 마포서(麻浦署)에서 출옥한 음악동맹원들이 나한테 다녀갔다는 애기를 하였더니 김구선생 얘기를 하면서 그 사람 틀림없이 한독당원일 것이니 그러면 그 사람은 건드리지 안키로 결정되었다는 것이다.
나는 생각해본 일도 없었던 혜택으로 하루 이틀 소일하고 있으리니까 시(詩)를 쓰는 박형이 찾아와서 오랫만에 안심하고 말을 주고 받고던 중 박형은 집에 오래 있으면 재미 없을테니 자기가 왜정 때에 보통학교 교원으로 있었던 경기도 가평(加平) 땅으로 잠시라도 피해 보자는 것이다.
가며는 대접도 괜치 않을 것이고 쌀 말이라도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이다.
나는 박형이 평소부터 진취적인 기질의 소유자가 되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저렇게 용기를 낼 수 있을까? 하고 반신반의 하면서 욕심도 많게 빈 자루 두 개를 들고 정릉(貞陵)에 있는 그의 댁으로 우선 가기로 하였다.
하루 이틀을 산곡(山谷) 사이로 흐르는 물에 몸을 담그고 가평 가는 꼐획을 박형이 짜고 있었다.
하루는 자기가 시내에 들어가서 노비를 구해가지고 올테니 집에 있으라기에 나는 ㅜㅁ덥기도 하여서 흐르는 물에 몸을 담그고 R29의 폭격하는 소리를 들어가며 여러 가지(상념)에 사로잡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오후에 박형이 『됐어 됐어』 하면서 소주 한병을 들고 오라와서 하는 얘기가 시골은 담배가 없으니까 돈을 가지고가도 소용이 없고하니 내일 아침 일찍 장수연행상(長壽煙行商)을 떠나자는 것이다.
일이 이쯤 진행되었으니 쾌히 승낙하기로 하고 소주 한 잔을 나누면서 우리 국군들이 반드시 계선할 터이니 교성곡(交聲曲)을 작시(作詩)하고 작곡하자는 것을 굳게 약속하고 담소를 하다가 만사 태평으로 돌리고 이날 보냈었다.
이튿날 노비도 없이 자칭 시인과 작곡가는 「장수연」 열갑씩을 자루에 넣어가지고 목적지인 가평에 가기 위해 망우리(忘憂里) 고개를 넘어섰다.
박형이 담소를 하여가며 걷더니 점심이라도 먹어야 될테니 앞으로의 행동은 일체 자기에게 맡기라는 것이다.
돈도 없는데 주막집 앞에 서서 이집 저집 살펴보더니 들어가자는 것이다. 들어서자 막걸리 한 잔 가져오라는 것이다. 그리고는 주인영감더러 담배는 무슨 담배를 태우느냐고 물어가며 결국은 「장수연」과 막걸리와 식사대금과 바꾸고 돈을 도리어 더 달라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가평까지 한 번도 실수 없이 박형의 「장수연」 외교행상이 주효(奏效)되어 안착한 셈이 되었다.
(<요셉>·작곡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