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안翁(옹)의 訃音(부음)을 듣고
한결같은 투쟁
「한국을 도우라」…遺言
발행일1961-08-27 [제292호, 4면]
우리 한국 사람은 우는 것을 좋아하고 또 울기를 잘 합니다. 서양 사람들은 좀처럼 우는 일이 없고 더구나 남자가 눈물을 흘려 우는 것을 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내가 처음이오 또 단 한 번 서양 남자 어른이 우는 것을 보았읍니다. 6년 전의 일입니다. 오지리 「잘쯔부릌」시 교외 「안테르링」에서였읍니다. 그날 마침, 이 6순이 넘은 노인의 둘째 아들이 새 신부가 되어 첫미사를 올리고 이 마을에서는 70년만에 처음으로 신부가 났다고 해서 원근간 하객들이 4백명이나 모여들어 축연이 한창인데 이 나 많으신 「신부의 아버지」는 무수한 축배를 받으시고 사랑하는 아들이 제2의 그리스도가 된 기쁨과 며칠 후면 한국으로 떠나 다시 만날 수 없게 될 슬픔에 「인사의 말」을 다하지 못하고 그만 우름보가 터져 눈물로 끝을 맺었던 것입니다. 나는 이 솔직한 노인의 눈물 속에 한국적인 인정을 느끼면서 그날 왼종일 마음이 흐뭇했읍니다.
이 노인의 펴생은 투쟁으로 일관했읍니다. 온갖 부정과 불의와 억압에는 도모지 참고 견딜 수 없는 성격이었읍니다. 그래서 「나치」 독일에 항거하다가 두 번이나 투옥되어 영어에 신세를 졌던 것입니다. 그렇다고 이 노인은 결코 무슨 정치가나 사업가는 아닙니다. 한 가정의 평범한 남편이오 평범한, 그러면서도 자식을 위하여는 약하기 한량 없는 아버지이었읍니다. 자식을 위하여는 아까운 것이 없는 한국의 아버지들과 조금도 다름이 없읍니다. 삼형제인 그의 백씨가 계셨다가 세상을 떠나면서 그 유산을 아우인 이 노인과 또 그 아우인 예수회 신부에게 물려 주셨는데 이 노인 형제는 그것을 다시 한국으로 떠나는 그 아들 신부에게 주었읍니다. 이 유산은 마침 공산국가 「항가리」 「첵코」를 지척에 바라볼 수 있는 반공선 가까이 있는 방대한 농장과 그 부속건물이었읍니다. 그 유산을 ㅂ다은 아들 신부는 여기에 반공전초적 수도원을 만들어 이 수도원에서 동방을 바라보며 끊임없는 영속 기구를 올리고 있읍니다. 또 여기서 동구의 각 국어를 공부한 수녀들이 벌써 수명 공산국가로 침투해 들어갔다고 합니다. 이 수도원 개설의 숨은 공로자가 실로 이 투지만만한 노인이었습니다. 이처럼 방대한 재산과 노력을 다해서 수도원을 이룩하는데 무조건일 수는 없었읍니다. 단 한 가지 조건, 그것은 이 수도원은 오지리 당에서 동쪽으로, 한국까지 사이의 침묵의 교회를 위하여 기도하는 곳이라는 것입니다. 이 영적투쟁이 이 노인의 마지막 투쟁이면서 또 영원한 투쟁이 되겠읍니다.
「잘쯔부뤀」에서 전차를 타고 20리_에 사는 이 노인 덕을 찾는 세계 각국 유학생들은 「안테르링」 7번지의 주소도 문패도 알아둘 필요가 없읍니다. 전차를 타면 차장이 으레히 그 댁을 찾는 손님으로 알고 차를 내리면 영원이나 동리 사람들은 또 으레히 그 댁을 찾는 손님으로 길을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오지리를 찾는 검고 누른 학생들은 다 한 두번 이 노인의 초청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아들이 한국으로 떠난 후로는 한국을 위하여 침식을 가리지 않고 한국의 일을 위하여 그 한국적인 인정 많은 눈물을 쏟았던 것입니다.
한국의 착한 벗 <요안.크라네빗터> 노인이 이달 3일에 한국 학생들이 많이도 모여놀던 그 집 그 방에서 「디모테오 후서」에 기록된 그대로 투쟁의 평생을 마치고 갈길을 또한 한결같이 걸어가셨읍니다. 『한국을 위하여 기구하고 한국을 도우라』는 단 한 마디의 유언을 남기고. 주여 망자에게 길이 평안함을 주소서……(慶大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