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칸디나비아」 旅行斷想(여행단상)
발행일1960-12-18 [제259호, 4면]
「놀웨이」 서울 「오슬로」에
10월 15일 「코펜하겐」에서 아침 7시반 차를 탔는데 「스웨덴」의 서해안(西海岸)을 거슬러 올라가서 오늘밤 6시20분경엔 「놀웨이」의 수도 「오슬로」에 다달을 예정으로서 도중 「헬시고」와 「할시보르히」 사이의 바다에는 배를 타야한다.
저녁 6시20분 드디어 지루한 기차여행을 「오슬로」에서 끝냈다. 「코펜하겐」에서 얻어온 소개편지와 갈 주소가 잇으므로 별 걱정은 없다.
『우리의 성모어머님병원』으로 갔다. 병원에서 일하시는 수녀님들은 매우 친절했으며 「오슬로」엔 한국사람도 있고또 한국에 갔다온 「놀웨이」 사람들도 몇분이 있다는 이야기도 해주었다.
10월 16일 이날은 주일이었다. 그래서 11시에는 『카테드랄』(主敎座聖堂) 창미사에 참가했다.
『그레도 인 우눔 데움…… 우남 상땀 가토리깜 엗 아뽀스톨리깜……』 하는 종도신경(信經)의 합창소리가 흘러나올 때에는 무척 감사로웟으며 다만 하나이신 천주님과…… 오직 하나이오 거룩하고 공번되고 종도로조차 내려오는 교회를 믿는 것이 그 얼마나 기쁜 일인가.
특히 이런 「프로테스탄트」국가에서 꾸준히 가톨릭신앙을 지키는 소수(小數)의 신자들이 부르는 『그레도』(信經)는 더욱 감명깊었다.
점심을 병원에서 먹고는 호강판이 되었는데 이유는 간단하다. 즉 한국전쟁때 의사(醫師)로서 한국에 가서 일하다가 돌아오신 닥터 <파우스>씨와 그의 부인이 자기들의 자동차로 「오슬로」시외와 「스크이 쟘핑」대(臺)까지 드라이빙을 시켜주었기 때문이다. 그 부인되시는 분도 한국 서울 구경을 하였는데 그때는 바루 4·19 혁명때였드라고.
『어떤 인상을 얻으셨느냐?』는 물음에 『아이구 그때는 그런때라서……』라고 자세한 대답을 회피했지만 한국을 매우 아껴주고 사랑해주는 분이어서 지금도 한국사람들을 자기 남편과 더불어 많이 돌보아주시는 이다.
『신부님 한국에서 이곳에 아주와서 가정부인으로서 살고있는 부인을 보는게 어떻습니까?』하고 <파우스> 여사는 나에게 말을 하시더니 다시금 재촉에 가까운 어조로 『꼭 한번 가서 만나보세요 우리가 지금 안내해 드릴테니까요』라고 말한다.
『도대체 어떤 분이냐?』고 물었더니 『교우입니다. 한국에서 「놀웨이」인과 결혼한 분인데 약 반년전에 이곳에 남편따라 왔읍니다. 애기가 하나 있어요. 아마 어려운 일도 있을 것입니다. 풍속, 언어, 음식이 모두 다르니깐요』라고 동정에 넘치는 답변을 하였다. 그래서 우리는 곧 가보기로 한 것이다.
때마침 K부인은 남편과 같이 라디오를 듣고 있었다. K부인과는 한국말로 인사를 주고받으니 진정 기뻐하고 반가워한다. 내외간의 사랑에 국경이 잇으리까마는 같은 민족, 같은 언어를 쓰는 부부와는 다른 점이 있을 것이다. 물론 오랜시일이 가면 다 해결되는 어려움임에는 틀림없겠지만.
보기에는 행복하게 사는 가정이다. 이런때 신부가 할 말은 그저 『기구 잘하고 모든 것을 공로가 되도록 하시라』는 것 뿐이었다. 어린애기도 이젠 방긋방긋 웃을 정도로 컷다.
차(茶)를 이 가정이 부부와 같이 마시면서 이런 이야기 저런 이야기 하다가 작별을 하였다.
『신부님 떠나시기 전에 한번 또 오세요 김치 담아 드리지요』 이런 말을 귀에 남기면서
10월 17일 아침 일찍부터 「오슬로」의 시가(市街)를 어슬렁 어슬렁 거닐어 보았다.
왕궁(王宮)을 찾아보았는데 왕궁에 국기가 달렷으니 틀림없이 임금님이 계신다는 표식, 출타(出他)하기면 국기를 높이 달아두지 않는 것이 관습(慣習)이란다.
<파우스> 의사 내외분이 주소를 적어주면서 찾아가 보라고 한 『한국협회』 사무실은 왕궁에서 그리 멀지 않았기 때문에 찾아 보기로 했다.
『노르스크 코레아 호레닝크』(Norek Korea Forening)라는 간판이 집앞에 붙어있고 사무실에는 약간의 한국물품과 잡지(雜誌)들이 있어 어딘지 몰라도 한국적 분위기를 느끼게 하였다. 그러나 물론 여기서 일보시는 분은 세분 모두가 「놀웨이」 사람들이며 한국전쟁때 이 나라에서 한국으로 가셨던 의사(醫師)들이 중추가 되어 생긴 협회(協會)이다. 참 뜻깊은 일이 아닌가.
10월 18일 시내에서 교외(郊外)로 나가 국립박물관과 『콘티키』 박물관을 보았는데 국립박물관 앞에서 우연히 알게된 한 사람이 있으니 그는 바루 미국사람으로서 나이는 50여세 되어 보이는 이다. 같이 산보를 하다가 이런 말을 하였다.
『나는 뉴욕에서 삽니다. 그러나 자주 유럽으로 옵니다. 그 까닯은 미국의 전통적, 역사적 배경을 이곳에서 찾아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무슨 새것을 찾아 본다는 것 무엇을 더 생각해 본다는 것이 인생의 아름다운 면의 하나이거든요』
「오슬로」가 항구(港口)도시요 「놀웨이」라는 나라가 바다를 이용해서 세계와 통할 수 있는고로 이곳 「놀웨이」사람들은 「스웨덴」 사람들 보다도 영어(英語)에 대한 관심과 열성이 많은 것으로 보인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