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르린=NC】 <되프흐너> 추기경은 「베르린」교구의 책임자라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소비에트」 구역을 들어가려는 것을 공산 경찰이 저지하였다.
이 사건은 성청의 <벵슈> 주교의 「베르린」주교 임명을 발표하기 전날인 8월 17일에 일어났다.
3일 전에 동 추기경이 신임지 「뮨헨」 및 「프라이징그」대구교구를 맡게되었다. 그러나 성청은 신임 주교의 임명 전에 「베르린」교구에 대한 동 추기경의 책임을 보류하였다.
「동베르린」 경찰은 동 추기경의 이름이 공산정권에 용납될 수 없는 특별 명부에 있다는 것을 주장하면서 「소비에트」 지역으로 들어가는 것을 막았다. 그 당시까지 <되프흐너> 추기경은 「동 베르린」에 들어다닐 수 있었으나 「베르린」의 「소비에트」 지역 밖에 있는 공산 치하의 지대로 들어감을 거부당했다.
2일 전 성모 몽소승천 축일에 「빨강」이들이 동서 「베르린」 사이에 설치한 「바리게이트」를 넘어가려는 동 추기경의 자동차를 막았다. 그러나 그는 걸어서 「소비에트」 지역에 들어갔다.
그의 월경(越境)의 전적(全的) 거부는 그가 「서독」의 종합 「텔레비죤」망을 통하여 5분간 연설을 계획하였던 같은 날에 일어났다.
그 뒷날에 이 48세의 추기경은 「베르린」의 공산당이 취한 가혹한 방법이 일으킨 고통이 나날이 더욱 심해간다고 주장하였다.
『우리 나라와 전세계의 백성의 운명을 위하여 책임을 띤 사람들에게』 호소하면서 그는 『과감하고 신중한 책임을 가지고 여러분은 적극적으로 비참과 투쟁해야 할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베르린」 사태에 관하여 그는 『각국의 복지를 위하여 인간의 자유와 존엄성을 위한 국제 조약과 명시된 의무의 진정하고 정당한 충실성이 얼마나 필요한가를 똑똑히 보이고 있다』라고 말하였다.
「동독」과 기타의 「소비에트」 지대에 있는 자기 교구의 신자들에게 직접으로 이야기하면서 그는 『가혹한 폭력의 환경에 대항하여 그대들의 가정과 그들의 본당구역에서 한데 뭉치라』고 말하였다.
그는 『우리에게 강요된 일체의 경계선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한 나라의 국민이며 한 천주의 자녀로 남아있다』라고 이어 말하였다.
그 다음에 <되프흐너> 추기경은 「철막」(鐵幕) 양편의 신자들에게 대하여 『미워하고 가혹한 생각이 그대들의 심중에 일어나지 않도록 하라. 형제를 돕고 고난을 더는 사랑을 함양하여 우리는 더욱 굳세고 더욱 자유롭고 더욱 즐겁게 된다』라고 말하였다.
8월14일에 「뮨헨」 및 「프라이징그」대주교로 「뮨헨」에 부임하기까지 1957년 이래 「베르린」의 주교로서 복무한 동 추기경은 9월30일에 「뮨헨」대성당에서 장엄히 착좌할 것이다.
「뮨헨」의 주교좌성당 평의회에 자기 임명장을 제시하기 전날에 그는 「뉴텐베르그」에 있어 그곳 대성당에서 「독일 청년 스포오츠제」의 참가자들에게 강연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