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納凉(납량)] 새벽녘 벽돌집
발행일1961-09-03 [제293호, 4면]
더위가 하도 심하니 시원한 고장이 아쉬워진다. 금강산에 놀던일 대동강에 놀던 일 여름 한철, 더운 줄 모르고 즐거히 지내던 그 때 일이 문득 그리워진다.
이제는 가려하나 갈 수 없는 노릇이니 당연 한심회가 새로워질 뿐이다. 대동강을 회상하니 모란봉, 을미대며, 능라도 버들숲에 적은 배를 매어놓고 어죽을 쑤어먹던 복(伏) 놀이가 더욱 간절하다.
내가 대동강을 마지막 본 것은 국군(國軍)이 평양(平壤)을 탈환하였을 때이다. 그 때 나는 백선엽(白善燁) 장군의 제0사단이 신계(新溪) 상원(祥原)을 지나 선교리(船橋里)를 거처 평양에 입성(入城)할 때 종군문화인(從軍文化人)의 한 사람으로 참가한 일이 있었다. 이때에 길을 같이 한 분이 바로 H신부와 K신부이다. 이 두 분은 모두가 해방 전 평양지구에 계시던 분이었다. 평양을 탈환하면, 곧 수난 속에 살아온 교우들을 찾고 닫혀 있던 성당문을 열어 성직자로서의 본분을 다 하고저 종군을 하였던 것이다.
나는 이 때 가톨릭에는 아무 관심도 갖고 있지 않았었다. 다만 키 큰 분과 키 적은 분이 한 「컴비」가 되어 사이 좋게 말이 없이 점잖게 지낸다는 생각 뿐이었다.
파죽지세(破竹之勢)로 김일성의 뒤를 때려 쫓던 우리 국군은 어느등 평양의 남방에 있는 선교리(船橋里)에 당도하였다. 9·28 서울 수복 후 계속 추격이 있은지 열흘 남짓하였다. 언덕에 오르던 평양시이 눈앞에 흐르는 대동강 언덕에서 하루밤을 지냈다. 밝는 날 아침이면 역사적인 평양 입성이다.
악마의 소굴!
도살자의 근거지!
이날밤 황제는 납치되간 동포들의 안부를 궁금이 여기는데 열중되었다.
이날밤 나는 신부의 일행과는 숙소가 달라져서 맞나지 못하였다. 국군 지휘관들은 역사적인 평양입성에 있어 제일착의 영예를 획득하고자 몹시 서둘렀다. 그것은 또 하나의 국군 부대가 평양 북편으로 돌아 거의 비슷한 시간에 입성하리라는 정보가 있기 때문이었다. 이미 평양성내는 텅비어 있었다. 김일성 일당은 강계(江界)까지 달아났다는 정보가 떠들어왔다.
시중에는 그들이 달아날 때 참살한 양민(良民)들의 시체만이 쌓여있다는 정보였다. 거리거리 파놓은 방공호는 동리마다 미움받던 반공산주의자(反共)들의 무덤터가 되였다는 것이다. 우리들은 새섬스러히 악마같은 그들의 만행에 몸서리쳤다.
어느듯 날은 밝았다. 평양에 역사적인 입성을 하는 날이다. 나는 먼동이 틀 무렵 눈을 떴다. 눈을 떴다기 보다는 기상을 한 것이다. 밤새도록 아군의 포성이 끊일 줄 몰라 한잠도 이루지를 못한 것이다. 모두들 아직 일어나지 않아 으쓱할 만큼 잠잠하다. 나는 혼자 일어나 적은 언덕에 오르려 하였다. 평양성을 바라보자는 것이다.
평양!
평양!
그 얼마나 그리던 이름이랴! 마침 동천이 붉어오며 아침해가 떠올랐다. 평양시중은 아침안개에 잠긴듯, 어렴풋 하였다. 한걸음 두걸음 언덕에 올라가려니…… 이미 나보다 먼저 오른 키 큰 이와 키 적은 이 두 모습이 마치 무슨 태고적부터 세워져있는양 평양 시중을 바라보고 있다. 가까이 가보니 H신부 K신부 두 분인 것이다. 하도 엄숙히 서 있는지라 나역 입도 못 벌리구 한 옆에 서서 그들이 바라다보는 곳을 같이 바라보았다. 평양시중 일각에 높이 솟은 벽돌집! 그게 곧 성당(聖堂)임을 즉각 깨달았다.
그래 나는 내가 천주교신자가 되리라고는 염두에도 없을 때이다. 그러나 두 분 신부의 엄숙한 태도 평양에 입성하기 직전! 성당을 멀리 바라보고 무엇인가 기구하는 성직자의 성스러운 모습! 나는 어느 틈에 두 신부를 따라 경건히 고개숙였던 것이다.
1·4후퇴 후 우리 전가족은 부산 초량성당(草樑聖堂)에 미국 출신이신 권신부(權神父)로부터 영세(領洗)하였다. 알고보니 이 권신부님이야 말로 바로 그 성당의 주임신부이시었다. 나는 아직도 기이하게 생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