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沙漠(사막)의 불꽃] (1) 821호실의 희열(喜悅) ①
발행일1961-09-03 [제293호, 4면]
1878년 10월2일의 「소뮤르」 기병학교의 학기 초다. 사관후보생(士官候補生)이 백명 가량 병영의 울타리쪽으로 올라가고 있다. 내일부터 승마, 강의, 훈련, 사격연습, 기마행진 등의 교과일정의 반복이 시작되는 것이다.
그날 <모레스>와 <후꼬오>는 「파리」에서 오는 기차에서 내렸다. 두 사람은 다같이 「육군사관학교」(쌩시에르)를 졸업하고 규정대로 1년을 「소뮤르」에서 지내기 위해 온 것이다. 역에 내리자 그들은 석양에 비치는 「롸아르」강을 보았다. 감격한 <모래스>는 석야의 아름다움을 천천히 맛보기 위해서 도보로 가려했으나 <후꼬오>는 지금부터 매일 해야 할 연습이 대단히 많다는 이유로 이의(異議)를 했다.
그리고 그는 전부터 피로를 느끼고 있었으므로 마차를 한 대 불렀다.
보통키(1메타 67센치)의 <후꼬오>는 비만하고 숭글숭글했다.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할 때 지방과다(脂肪過多)로 아슬아슬하게도 입학을 거부당할번 했던 것이다.
그는 겨우 18세였응나 이미 오래 전부터 미주미식(美酒美食)에 잠겨 있었던 것이다. 그는 점차로 면학(勉學)을 경멸히 여기게 되었으며 4백12명 가운데에서 82호로 사관학교에 입학한 그가 3백86명에서 3백33호로 그 학교를 졸업했던 것이다.
키가 크고 날씬한 <모레스>는 작난꾼임에도 불구하고 가장 빛나는 사관학교생(쌩시리앵)의 한 사람이었다. 부유하고 더욱이 작위(爵位)까지 가진 이 두 사람은 사치와 방종에 열중하고 있었다.
「소뮤르」에서는 그들은 82호라는 번호가 붙은 방 하나를 공동으로 쓰게 되었으며 그것이 학교엥서 가장 물의를 일으키는 방이 되었다. 최초부터 <모레스>는 말쑥한 몸차림을 하기 위하여 양복점과 양화점을 돌아다녔다. <후꼬오>는 이점에서도 오랫동안 지고 있지는 않았겠지만 우선 미장서적(美粧書籍)과 식량과, 고급주와 긴의자와 안락의자 등 풍부한 살림을 모우기 시작했다. 그는 그 시가에서 가장 멋진 이발관을 택했으나 그것이 약간 먼듯하게 생각되면 더욱 편안하게 하기 위하여 이발사를 자기 방으로 오게하였다.
그는 처음에는 매우 신중했었다는 칭찬을 받아도 좋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모레스>와 그는 얼마되지 않아 군기(軍紀)를 물란케 했다는 이유로 엄한 금족의 회수를 더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가슴에 화려한 장식을 한 흰흐린별 파자마를 입고 고급 「상파뉴」와 「호와 그라 과테」 요리를 먹으며 우아한 장정(裝정)으로된 「아리스토 파아네스」의 호화판을 읽으면서 멋진 안락의자에 기분 좋게 누은 <후꼬오>를 보지 못한 사람은 삶을 즐기는 인간이 어떠한 것인가 하는 관념을 알 수 없는 것이다』라고 후에 <유르바르> 장군이 된 그의 동급생은 말하고 있다.
<사를르 드 후꼬오 드 퐁브리앙> 자작(子爵)은 「패리구으르」 주(州)의 귀족 출신이며 부유한 가정의 사람이다. 그는 『사자의 머리』(붉은 색으로 그려있다)와 은으로 된 두 개의 아아취가 있는 다리(橋=이 絞章의 도안은 빛나는 다리 「퐁브리앙」을 뜻한다)로 장식된 고래의 문장을 가질 권리를 가지고 있다. 『결단코 후회하지 않는다』라는 그 조상의 표어는 자랑스러우나 그는 이말을 반대로 유명하게 하였던 것이다.
<후꼬오>의 유년시절은 부유하고 평온한 환경속에서 거리낌 없이 지났다. 그러자 치수보림감독관(治水保林監督官)이었던 그의 부친 <에드와르 드 후꼬오>가 그의 나이 불과 다섯에 중환 폐병에 걸려 퇴직하게 되어 그들 가족은 생활고로 부득이 헤어져 있지 않으면 안되었다. 대대로 장관(將官)이 많이 난 명문가 출신인 <후꼬오>의 모친 <에리사베스 드 후꼬오>는 이 뜻하지 않은 인생의 급변한 타격으로 인해 1863년 6월에 세상을 떠났고 <에드와르 드 후꼬오>마저 그로부터 5개월 후 파리에서 사망했다.
고아가 된 <후꼬오>와 그보다 나이 세 살 아래인 누이 <마리>는 그때부터 그들의 외할아버지인 퇴역보병대령 <드 모를레>씨에게 맡겨졌던 것이다.
1878년 2월3일 사관학교에서 <샤를르>가 최후의 학년을 수학하고 있을 때 80세로 그 외조부는 사망했다.
어릴 때부터 그를 맡아서 아낌없이 사랑과 지원을 베풀어주던 노인은 이미 없어진 것이다. <사를르>는 끝없는 슬픔을 느겼다. 수개월 후인 9월15일 20회의 생일을 당하여 그는 가산을 상속했다. 자유로 막대한 재산을 자기 앞으로 소유할 수가 있었기 때문에 그는 가장 말석으로 육사의 졸업시험을 끝마치고 그때마침 「소뮤르」에 있는 기병학교에 들어가려하고 있었다. 이미 그의 뒷받침을 해주던 조부는 없었으나 기병장교가 되는 것은 좋았다. 털장식은 좋으나 피로한 생활은 싫었다. 태만과 악희(惡戱)는 그럭저럭 그가 육사시험에 합격하는 것을 방해하지는 않았다. 「소뮤르」에서는 이 방면에 있어서 그는 신기(神技)를 배가시킬 작정이었다.
이처럼하여 기병학교의 병사 울타리 속에서 <모레스>의 협력을 얻어 <후꼬오>는 쾌락주의의 생활을 영위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소뮤르」에서의 일년간을 <후꼬오>는 21회의 경금족령(脛禁足令)과 45회의 중금족령을 받았다. 두 사람의 급우였던 <벨소쿠으르>는 결코 그 추억을 잊을 수 없을 것이다.
『<모레스>는 눈을 번쩍이고 두 팔을 풍차와도 같이 움직이며 그의 자유를 빼앗은 군기를 저주하면서 대활보로 어쩔줄 모르며 시내를 돌아다니고 있었다. <후꼬오>는 반대로 긴 의자 위에 아메리카식으로 옆으로 가로 누어 한가한 눈초리로 향기 높은 여송연을 피우고 있었다. 그리고 이 열반(열槃)의 법열(法悅)을 조금도 이해 못하는 불행한 친구들을 가련히 여기고 있는 듯했다』
외출할 수 있는 날에는 그들은 반드시 그곳에서 제일 유명한 요리점인 「뷰당」으로 만찬을 하러갔다. <후꼬오>가 특별히 좋아하는 요리는 「알리칸태」주를 몇 병 첨가하고 「카나페」에 올려놓은 자구(자_)의 병아리였다는 것이 알려져있다.
<후꼬오>는 너무도 지나치게 안락할 것을 생각한 결과 어떤날 친구 <아이온>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한다.
『여보게 맛있는 저녁식사 후에는 좋은 여송연에 더한 것은 없네 그리고 집에 돌아올 때는 차를 타는데 그다지 다리를 높이 들 필요가 없게 하기 위하여 아주 키가 작은 「꾸페」가 좋지』
그는 20세였다.
때때로 그는 「소뮤르」에 있는 친척을 방문했다.
언제인지 <모레스>와 <후꼬오>는 막대한 비용으로 파리에서 논단이 여자 일단을 오도록 하엿었다. 그게 집들의 비단옷 스치는 소리와 은근한 웃음소리와 기운찬 기병들에게 끌려서 비밀실로 들어가는 자극적인 광경이 얼마 안되는 작은 시가지 전체를 뒤흔들었다. 요리점의 주인과 심부름꾼들은 그들의 쓰는 돈이나 팁이 호화로웠기 때문에 더욱 관대하게 되기 쉬웠다.
이것이야말로 『장미색의 촛불』이나 『작은 동란』의 모험을 이야기할 때 <바레스>가 독자적인 잔혹한 정직성으로 묘사한 이야기의 종류이다.
<후꼬오>는 무엇을 하여 마음을 위로할지 몰랐다. 「소뮤르」 시대도 마지막에 가까워진 9월에 그는 또 중금족령을 받고 있는 기간이었는데 근근 「투우르」에서 축하연이 베풀어진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그것을 놓쳐버리기가 아까웠으므로 노동자의 작업복과 모자를 빌려가지고 수업을 부쳐서 얼굴을 달리하고 수위 앞을 무사히 빠져나와 기차를 탓다. 「투우르」에 도착하자 그는 우선 어느 작으마한 레스트랑에서 저녁을 먹었다. 상점 주인은 그의 이상한 모습을 눈여겨 보았다. 별안간 덧붙힌 수염이 떨어졌기 때문에 강도나 혹은 무정부주의자가 나타났음에 틀림이 없다고 생각한 주인은 비밀히 경찰에 고발했다.
몇분 후에 두 사람의 경관이 용의자를 체포하려 왔다. 파출소에 이르자 그는 그 동안의 모든 이야기를 고백하여 경찰서장을 웃기고, 자기 자신도 웃으면서 파출소에서 나왔다. 이 때 길가에서 그의 시선이 「소뮤르」의 병영지위관(兵營指揮官)인 <톳트>장군의 시선과 마주치고 말았다.
그는 이 일로 인하여 기병학교에 있어서의 최후의 날에 이르러 3일에 중금족령과 「투우르」 사람들에게 『두 사람의 헌병에게 잡혀가는』 족하를 보이고 말았다고 크게 노한 숙모의 분노에 가득찬 서한을 받았다.
그러나 이것은 죄인의 반항을 더욱 강력하게 만들뿐이었다. 그는 중금족령을 마치고 나서 그것으로 충족하다고 생각했다.
그의 종자매인 「마리」도 마찬가지로 그에게 편지를 보내왔으나 그는 옛날과 변함없는 깊은 애정을 대단히 상하게 하였다는 것을 느꼈다. 그래서 그는 몇일 동안은 깊이 감동하고 있었으나 또다시 쾌락에 돌아가고 있었다.
학년 말에 그는 다음과같은 총감(總監)의 단서(但書)와 함께 87인 중 87번으로 「소뮤르」를 졸업했다.
『성격은 고귀하며 바탕이 좋다. 그러나 경솔하며 쾌락만을 쫓아 다닌다. 소행불량과 증벌때문에 때때로 휴가를 없애버렸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