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沙漠(사막)의 불꽃] (2) 出征 ①
발행일1961-09-10 [제294호, 4면]
1879년 10월 「소뮤르」를 졸업하고 <후꼬오>는 「세잔느」의 제4경기병대(輕騎兵隊)에서 육군소위로 서임(敍任)되었다. 그는 여기서 놀랄만큼 염증이 나서 하는 수없이 조금은 참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되는 「퐁타무숑」으로 전임해갔따. 그가 거처하게 된 독신 아파트만으로는 물론 만족할 수가 없어서 팔의 「보에티이」가(街)에도 휴가용의 방을 빌렸다.
그는 전보다 더 한층 비만해지고 있었다. 경기병 때 사진을 보면 무거운 얼궁를 하고 있으며 건담가(健啖家)다운 입과 완전한 도학자의 눈초리를 하고 있으며 구레나루를 포마아드로 곱게 부치고 있다.
그의 새 친구들 중에 「퐁다무숑」의 경기 소위인 「드휫쯔제임스」 공작은 <후꼬오>를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는 완벽한 순진성과 다시 없는 세밀한 마음씨로서 자기의 주머니를 우리에게 이용하도록 하였다. 때때로 카페의 음식물을 내기할 때 자기가 너무도 이겼을 때 그는 대단히 교모하게 일부러 저주려 하는 것을 나는 보았다. 그는 하인을 하나 두고 영국식의 마차와 말을 하필 갖고 있었다.
그는 병영에도 자택의 문전에도 마차를 매놓아 그것이 남의 눈에 뜨이게 하지 않았다. 그는 결코 자기의 사치로서 사람들을 매혹시키지 않았떤 것이다. 그의 소대는 그를 존경하는 그 만큼 그를 사랑하고 있었다.』
그가 재질에는 뛰어났으나 절조가 결핍되어 <미미>라는 여자와 관계하도록 되었던 것도 바로 이때의 일이었다.
마음속 깊이 숨겨둔 것을 <후꼬오>는 누구에게도 고백하지 않았던 것이다.
『나는 나쁜 일을 해 왔으나 악을 승인하고 있었던 것도 아니고 사랑하고 있었던 것도 아닙니다. 당신은 나에게 어떠한 고통에 쌓인 허무감을 그 당시 이외에는 경험한 일이 없는 일종의 슬픔을 느끼게 하였던 것입니다. 이 슬픔은 저녁마다 나 혼자만이 자기 방에 있을 때 내 앞으로 돌아오게 하는 것이었읍니다.』
그 후 몇해인지 지나서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그는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만일년이 이와같이 지나가버렸다.
1880년 12월 제4경기병대는 「알제리아」의 「세피트」에 주둔하기 위하여 소집되었다. 그 지방에서 제4경기병 기병대라는 이름을 사용하게 되었다.
<후꼬오>는 출발할 결심은 정해졌으나 생활을 변경시키려고는 하지 않았다. <미미>를 동반하고 가는 것이다. <미미>는 수송대보다 몇일 앞서 출발하여 「알제리아」에 제일 먼저 도착했다. 그 여자는 그의 처나 되는 듯이 「세터프」와 「보오스」에서 영접을 받았다. 그 여인은 매우 용하게 자기의 역할을 연출했으므로 프랑스의 거물들이 다 그를 친절히 맞아들였다. 뒤를 이어 부인을 동반하나 대장(隊長)과 사관들과 연대 전체가 도착하게 되자 전례없는 추문이 되고 말았다.
연대장은 부하인 소위에게 심한 충고르 하였으나 소위 쪽에서 조금도 양보할 생각은 없었다. 비난하는 소리가 높아지는데도 불구하고 그는 전보다 더 심하게 <미미>의 신변에서 여러 사람의 눈을 끌고 있었다.
모든 사람의 항의로 대장은 그에게 <미미>나 연대나 둘 중에 하나를 택하기를 그에게 강요했다. <후꼬오>는 주저하지 않았다. 즉 그의 애인을 추방할 생각은 없었다. 대장은 이 일을 파리에 보고 했다. 수일 후인 1881년 3월20일 육군성의 결정에 의하여 <드 후꼬오> 육군소위는 군기 위반과 모든 사람이 다 아는 불미한 해옫ㅇ으로 인하여 정전이라는 형식으로 활동금지 처분을 받았다. <샤를르>라는 명랑하게 친구들에게 태연하게 이별 인사를 하고 <미미>와 함께 「에뷔앙」으로 향해 출발했다. 그때 나이 22세였다.
그로부터 3개월이 지난 6월에 <후꼬오>는 시간을 보내기 위하여 신문을 펴들었다. 그는 하품이라도 할 지경이었다. 별안간 지상(紙上)의 문자가 폭발하여 불과같이 타올랐다. 『남(南) 「오랑」 현 「울드시디 세이크」족(族)의 폭동 제4경기(__) 병대는 전투에 돌입』 삽시간에 아프리카 의 하늘은 「에뷔앙」을 불태워버렸다.
<후꼬오>는 읽고 또 읽었다. 사막의 침묵은 모든 소리를 억누르고 있다.
질주하는 기병들, 총화, 아라비아병과 아프리카 엽기병, 전쟁을 달리는 친구들의 얼굴. 친구들은 다 전쟁에 있다. 그리고 <후꼬오>는 「에뷔앙」에 있다. 가만히 있을수는 없다.
이때 별안간 <미미>는 벌써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버렸다. <후꼬오>는 그 여인 때문에 자기의 직업을 희생하였으나 남자로서의 명목은 희생하지 않는다.
그는 즉시 파리로 돌아와 육군성에 달려가서 즉시 복직을 자원했다. 육군성은 주지했다. 그래서 그는 단지 알제리아 기병으로 입대할 결심이라고 단언했다. 어떠한 댓가를 주고서라도 그는 전투에 따라갈 결심이었다. 그래서 육군성은 그에게 이진의 지위를 복구시켜주었다. 그는 즉_에 아프리카로 향하여 출발했다.
1881년의 불령(佛領) 「알제리아」는 아직 「모록코」와 사하라와 「튜니시아」와 남부의 경계를 노도와 같은 유목민에게 짓밟혀 때때로 애매하게 국경선을 가진 커다란 식민반도에 지나지 않았다.
그해는 비극적으로 시작되었다. 수인의 프랑스 사관과 86인의 토민의 저격병과 함께 「사하라」의 심장부를 탐험하러 출발한 <프랏텔> 대장은 2월18일 「호가아르」의 맨 가운데의 「가라마」의 우물 가까운 곳에서 2백명의 「투아레그 켈 아하가아_」족에게 습격되었다. 최초의 사격에 벌써 대장과 사관들은 쓸어지고 말았다. 저격병들은 제빨리 도망친 몇 명을 제하고는 거의 학살되었다. 이 대참사는 별안간 북아프리카 전토에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다.
5월, 제4엽기병대-후꼬오의 연대-에서 4중대가 <인노상티> 대려으이 명령하에 원정의 길을 떠났다. 그러나 불의에 습격을 당하여 대열은 막대한 손해를 입고 모든 물품을 습격자에게 뺏기고 겨우 후퇴해왔다. 이 성공에 기고만장한 「울드시니 세이크」족의 폭동은 더욱더욱 확대했다. 상륙하자마자 <후꼬오>는 「모륙_」 전쟁의 한가운데에 뛰어들었다.
그의 돌연한 변모는 같은 제4엽기병대에서 소위로 있던 육사시대의 옛친구 <라페리이스>를 아연케하였다.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원정대의 위험과 궁핍 속에서 흥분된 이문관은 가장 심한 시련을 명랑하게 참았으며 항상 자진하여 곤란을 당해내고 헌신적으로 부하의 시중을 들어 병사로서 또 지휘관으로서 자기의 본령을 발휘했다』
한 사람의 엽기병은 「아프리카」의 태양 아래서 모든 것을 소_해버린 행군 뒤에 마실것이라고는 짜디짠 우물물 밖에 없었을 때 어떻게하여 소위가 부하들에게 훌륭한 「괌주」 한병을 주었는가를 말한 다음
『그는 사랑을 받는 방법을 알고 있었읍니다』라고 단언한다. 친구들과 함께 <후꼬오>는 「울드 시디 세이크」족을 정복하기 위하여 싸우고 있었으나 그는 적수를 경멸한다기 보다는 오히려 그들의 용기와 종교심에 감탄하고 있었다.
『회교는 내 속에서 무엇인지 깊은 동요를 일으켰다. 신의 끊임없는 현존 속에 사는 사람들과 그들의 신앙을 보는 것은 나에게 무엇인가 세속적인 사항에 종사하는 이상으로 보다 위대하고 보다 진실한 것을 엿보게 하였다』라고 그는 후에 말하고 있다.
<후꼬오>보다 연장자인 종형제 <카스트리>중위는 이미 몇 번이나 사막 속에서 지고자(地高者)를 예배하기 위하여 지상의 모든 활동을 중지하는 것을 보았다. 그럴때마다 그도 그와같은 고밍늘 느꼈다. <카스트리>는 말하기를
『나는 멀리 비켜났다. 구녕이 있으면 들어가고 싶었다. 나는 수많은 두건붙은 외투가 한꺼번에 예식적으로 평북하는 장엄한 몸짓을 보았다. 나는 『알리아·아크바로』(신은 가장 위댛나 것이다)라는 기원이 한층 더 높은 곡조로 일어나는 것을 듣고 있었다. 나는 불쾌에 사로잡혔다. 나는 그들에게 외치고 싶었다. 나 역시 기원할 수가 있으며 예배할 줄도 안다』
그리스도교도의 자식이며 세례를 받은 후에 불신자가 된 <후꼬오>가 이번에는 이와같은 광경을 바라보다 그와 같은 반응을 경험했다. 16세 때 그는 서적을 신용하여 제종교간의 모순은 모든 종교가 무가치한 증거라고 판단했다. 오늘날 사막의 극변에서 희교도들이 기구하는 것을 보고 그는 질투어린 찬탄에 마음을 찢어내는 듯한 느낌을 갖게 되는 것이다.
제4엽기병대가 전장을 띠나 주둔군의 생활을 재차 시작했을 때 <후꼬오>에게는 그 결심이 정해지지 않았다. 그는 이미 몇 차례나 그와 마찬가지로 회교 아프리카에 열중이 되어 있는 사관들 <리요티>, <모티린스키>와 친교를 맺었다.
이미 그는 그들과 같은 정열을 가지고 「아라비아」 세계의 한 가운데 뛰어들어가고 싶은 것밖에는 꿈꾸지 않았다. 그는 탐험여행을 하기 위하여 휴가를 청원했으나 거절당하고 말았따. 사관들은 그를 바람둥이 인간이라고 보고 있었다. 그는 즉시 사표를 제출했다.
1882년 1월28일 그는 재차 군대와 해어졌다. 그러나 이번에는 한 여인 때문에는 아니다. 이것은 북아프리카를 위해서였다. 그는 23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