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포] (80) 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원
兄弟愛에 뭉친 殉敎者 後孫들
품팔아 번 돈이 수도원 돼
발행일1961-09-17 [제295호, 3면]
우리나라에서 설립되고, 방인 수사·신부만의 한국 순교복자 성직 수도원은 창설된지는 얼마 되지 않으나 허다한 애로를 겪으면서도 씩씩하게 발전되고 있다.
서울 성북동 고개를 넘어서 졸졸 흐르는 냇물을 따라 왼편쪽으로 가느라면 멀리서도 「고딕」식의 색채조화를 잘 이룬 건물이 눈에 뜨인다.
수사님의 안내를 받고 이층 넓은 「홀」로 올라갔다. 남자들만의 수도원이라서 그런지 어딘가 정돈이 덜 된 느낌이 든다. 그리고 한창 작업중이라서 기계소리가 요란하다.
이 수도원을 창설하신 <안드레아> 방(方存龍) 신부님은 1947년 개성에서 「복자수녀원」을 창설할 무렵부터 동 수도원을 꿈꾸셨고 마침내 1953년 11월 서울 제기동본당 신부로 재직시 몇 명의 첫 지원자들을 모아 본당 한 구석방에서 그 창설을 보게되었다. 당시 지원자들은 생활을 영위하기 위하여 낮에는 노동을 하여야만 되었다.
1954년 2월 동 신부님이 후암동 본당으로 전임하게 되어, 회원들의 거처가 막연하게 되었다. 이 때 서울교구 <노> 주교님과 당시 __명동본당 <금_> 정신부님의(현 서울혜화동 주임)의 주선으로 현 가톨릭대학 의학부 지하실 일부에 이사하게 되었다. 그리고 회원들의 기술과 소질에 따라 건축, 미장, 철공, 사진 등 각 분야에 걸쳐 활동을 시작하였다. 특히 건축부에서 시작한 「철제 트렁크」는 호평을 받게되어 1955년부터는 전적으로 이것에만 주력하게 되었다.
점점 인원이 증가함에 따라 숙소의 난관에 봉착하던 중 마침 서울 제기동의 <돈보스꼬>씨가 현 수도원 대지의 권리를 양도함으로써 정부로부터 불하를 받아 1955년 3월6일부터 동 장소에 회원 일부가 이동하여 숙사 건축에 착공하였다.
동 회원들은 흙벽돌을 손수 찍어 만들며 온갖 힘을 들여 일하였으나 자금난으로 동 6월에 숙사 외부는 완료되었지만 3층 성당 건물은 절망상태였다. 이 성당 공사 중 몇 번이나 중단치 않으면 안되었고 그때마다 전 회원이 품팔이를 나가야만 하였다.
동 수도원 낙성은 1957년 5월6일 회원들의 노동의 힘으로 이루어졌다. 대지 344평에 연평 5백여 평으로 1층은 주로 작업장이며 2층은 식당, 3, 4층은 성당과 침실로 사용하고 있다.
동 수도원은 1955년 11월에 인가신청을 하고 그 이듬해 12월26일 정식으로 인가되었다.
전 회원은 57명이며 동 본원에는 40여 명의 회원이 있으며 약 10명은 대학 및 고등학교 재학 중에 있으며 약 20명의 회원들의 손으로 철제 「트렁크」가 제조되고 있다.
본원으로는 새남터에 국민학교도 못 가는 아동들을 위하여 무료로 학원을 경영하고 있고 제주도 「서귀포」에도 회원 3명이 가 있다. 또 인천 만수동에는 농장 3만5천평을 작만하여 가축과 농사를 하고 있는데 금년에는 감자 1천여 가마의 수확이 있었다고 자랑한다.
동 수도원의 「못토」는 「형제애」이며 기구하며 서로 도와 일하는 노동수도회이기도 하다.
당가 수사님의 「고통의 생활」을 하시던 지난 얘기를 들으면서 필자는 여러 번 고개를 수그렸다.
점심을 알리는 삼종소리가 난 지도 오래된 것 같아 수사님의 점심식사 걱정이 되어 만류를 물리치고 실례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