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沙漠(사막)의 불꽃] (3) 미지(未知)의 「모록코」 ①
발행일1961-09-17 [제295호, 4면]
사직후 즉시 <후꼬오>는 「알제」로 갔다. 그는 이 지방의 발레고개(峴) 58번지에 잠시 체제하려고 하였었다. 그가 경험한 방해는 한층더 그 계획에 대해서 결심을 굳게했다. 그는 거의 전면적으로 귀순한 알제리아 남부를 탐험여행하기 위한 휴가를 거절당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당시 독립하여 있으며 광폭한 모록코 탐험여행을 착안했던 것이다.
대체 어느때 이와같은 생각이 그 머리 속에 싹터나왔던 것일까. 그것을 정확히 알 수는 없다. 그러나 대체로 역시 「부우 아마마」가 무엇인가 거기에 관계가 있는 것 같다. 폭동이 끝났을 때 그는 「알제리아」에 속하고 있는 「우쟈」와 「휘기그」 사이의 「모록코」 국경지역에 숨을 곳을 찾았다. 이 영익에서는 프랑스 정부도 이미 그를 추적할 수는 없었다.
「아트라스」 사냄ㄱ이 겹겹이 둘러싼 북아프리카의 서쪽 끝에 있는 당시의 「모록코」는 대서양의 입구에 있는 회교문명의 대요색이었다. 오색찬란한 시가와 어둠침침한 노점, 중세기의 성벽 뒤에 있는 비밀의 정원으로 가득찬 천일야화(千一夜話)의 「바그다드」와도 같이 아름다운 거리, 푸른 평야 욱어진 숲, 확막한 산과 산, 사막으로 가는 유목의 기수(騎手)들로서 「모록코」는 현재 남아있는 과거의 위대한 섬이며 19세기에 있어서의 원시시대 혹은 중세기의 거대한 시가(市街)의 한구석이다.
그러나 예술과 철학과 신비와 시문(詩文)에 있어서 그처럼 위대하고 그처럼 빛나던 이 제국도 지금은 퇴폐의 극단에 있다. 「모록코」는 당시 정력적이며 뛰어나게 총명한 군주(술탄) <레이 핫산>에게 통치되고 있었다. 그를 만날 수 있었던 여행자들은 흰 두건(頭巾)이 달린 외투를 입고 백포(白布)로 얼굴을 가리고 금실로 수놓은 녹색 「비로오드」로 장식을 한 백마를 타고 한편에서는 노예들이 거대한 붉은 파라솔을 바치고 그 옆에서는 파리를 쫓고 있는 그의 위용을 묘사하고 있다.
그 옆에는 고관들과 기수와 악사들과 붉은 복장을 한 호위대 등의 가지각색 사람들이 와글와글 끓고있다. 저 멀리에는 휘두르는 작대기에 쫓겨 다니는 회색 두건이 달린 외투를 입은 민중과 저편 성벽 위에는 베일을 쓴 여자들의 머리가 무수하게 보였다.
군주는 계속적으로 여행을 하고 있다. 때로는 「휏쯔」, 「라바」, 「메크네스」, 「마라켓시」 등 고도(古都)의 왕국에 체재한다. 그보다도 그는 더욱 빈번하게 징세(徵稅)를 하기 위하여 방랑생활을 하며 독립 부족들을 정복한다.
그가 통과하는 곳의 대지(大地)에는 수천의 텐트의 꽃이 핀다. 즉 호위대, 후궁(後宮), 유목민의 시장, 정규군(正規軍)과, 그 지역의 귀순한 부족들 중에서 징집(徵集)된 병대 등.
「모록코」는 무제한의 전제정치의 나라인 동시에 무제한의 무정부상태의 나라다. 도로도 없고, 다리도 없으며 가는 곳마다 세금의 불법징수(不法徵收)와 전제(專制)는 완성했다.
이 시대에 이 지방의 야만적이며 장엄한 아름다움을 자기 눈으로 직접 볼 수 있었던 유럽인은 드물다.
광폭할 정도로 독립을 사랑하며 외국인을 싫어하는 이 지방은 법률의 규정과 동시에 이 지방을 사방에서 둘러싼 광대한 불귀순지대(不歸順地帶)에 의하여 이중으로 방위되어 있었다.
탐험을 하려고 「모록코」에 들어가려는 유럽인들은 몸을 숨기고 생명을 걸지 않고서는 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1828년에는 <흐네.카이에>가 회교(回敎)도 학생으로, 영국인 <바아튼>과 <방베리이>는 회교승(回敎僧)으로 의장(儀裝)하였던 것이다. 만일 그들이 그리스도교도라는 정체가 폭로되면 용서없이 학살당하고 말았을 것이다.
『이 극도의 불관용(不寬容)은 종교적 영광에서가 아니라 그것은 원주면 모든 사람들에게 공통된 다른 감정에 근원을 가지고 있다. 즉 그들에게 있어서는 자기나라를 여행하는 유럽인은 그 나라를 정찰하기 위하여 파견된 간첩 이외의 것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그것은 침략의 목적으로 지세를 연구하러 오는 것이니 틀림없는 스파인 것이다. 유럽인은 이교도(異敎徒)로서가 아니고 스파이로서 학살 당하는 것이다. 아마 민족적인 반감과 미신(迷信)도 역시 섞여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와같은 감정은 이차적(二次的)인 것에 불과하다. 그리스도교를 증오하는 것 보다 훨씬 정복자를 무서워하고 있다』고 <후꼬오>는 말하고 있다.
그러나 탐험가의 대담성을 자극하는데는 외인을 싫어하고 문을 닫는 나라보다 더한 것은 없다.
<후꼬오>가 비밀히 들어가려고 열망한 곳은 이러한 「모록코」다.
그는 그것때메 만반 준비를 갖추었다.
「부우·아마마」와의 전쟁이래 게으르고 느린 버릇은 전혀 없어지고 말았다. 그는 「아라비아」어를 공부하여 「모록코」 지도와 인문지리의 지세 또 이 시대 「모록코」에 관해서 알려져있는 모든 것을 연구하고 있었다. 그는 지도와 측정도를 작제(作製)하는 기술 등과 육군사관학교에서 건달로 배우던 것을 철저히 연구했다.
그는 모험가로서가 아니고 고도(高度), 위도(緯度), 경도(經度)를 측정할 수 있는 과학적 탐험가로서 출발하는 것이다. 그의 주요한 연구실은 「알제에」시에 있는 도서관이었다. 「무스파타 파샤가 18세기에 상나무의 벽판으로 장식한 훌륭한 중간마당이 있는 「모오르식」 궁전 속에 설치한 이 도서관에는 아프리카 세계에 관한 광범한 참고문헌이 수집되어 있었다. 도서관 장인 <오스카르 막크카이>는 아프리카 열애자였다. 그는 한 번도 「퉁부크투」에 가보려는 꿈을 실현하지는 못했으나 알제리아의 모든 텐트부락을 알고 있어서 이 지방에 관한 무수한 문헌을 모으고 있었다.
<후꼬오>가 자기 계획을 이야기하러 왔을 때 이 늙은 도서관원은 즉시 그에게 마음이 쏠리고 말았다. 그는 이 청년이 필요로하는 모든 서적을 가르쳐 주었다.
그는 <후꼬오>에게 만일 그것이 없음녀 모든 지식도 탁상공론이 될 것이며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실제적인 지식을 아낌없이 말해주었다. 그리고 그 청년에게 모든 유익한 추천장을 주었다.
바로 그와 같은 때에 프랑스에서는 모든 일이 전연 다른 모양으로 진전되고 있었다. <샤를르>의 사직은 <이네스> 숙모를 불안하게 하였으며 분개하게 했다.
그뿐 아니라 이 청년은 유산을 자유로 만진 이래 4년이 못되서 그 당시로서는 막대한 액수인 11만 프랑을 이미 소비하고 있었다. 지금 그는 「모록코」 여행이라고 하는 정치 없는 공상을 품고 있다. 무엇이 어쨌든간에 그에게 수갑을 채우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했다. 자기의 족하가 재산을 허무하고 쓸데없는 사치로 낭비하고 있다는 사실을 근거로하여 <이네스> 숙모와 그의 남편은 족하에게 법적 후견인을 부치기 위하여 「난시」(샤를르는 아직도 조부집에 적이 있었다)의 민사재판소에 민법 제3백15조에 의한 소송을 제기하게 되었다.
자기의 변호를 위하여 석명(釋明)을 진술하도록 권하는 재판소의 소환장을 받았을 때 <샤를르>는 「알제」의 도서관에서 부지런히 공부에 힘쓰고 있었다.
그는 자기야말로 여러 가지의 우행을 하여 한탄할만한 방법으로 재산을 관리한 것을 누구보다도 먼저 인식하는 자라고 대답하였다.
1882년 6월12일 재판소는 <후꼬오>를 낭비자로 단정하여 난시에 살고 있는 최년장자인 종형_ <라투우쉬>씨를 법정 후견인으로 그에게 책임을 지웠다.
그날 이래로 <샤를르>는 여전히 계속하여 자기의 이득을 향유할 수는 있었으나 <라투우쉬>씨의 허가 없이는 원금을 자유로 쓸 수 없었다.
모범적 생활을 하고 있었던 이 시기에 무분별자라는 명칭을 듣는 것을 그 자신도 긍정한 <샤를르>는 이와같은 굴욕적인 처분에 불평없이 따랐다. <라투우쉬>씨와 그는 서로 기분 좋게하기 위하여 모든 일에 조심했다. <라튀우쉬>씨는 이밖에 이 청년의 도덕상 조언자가 되려는 노력까지 하였다.
『저항과 동시에 우정을 두텁게 나타내는 어떤 견고한 의지에 지배되고 있는 것을 느끼고 <샤를르>는 놀랐읍니다. 그래서 제맘대로 하지 않고 지도하는대로 복종하며 완전히 나에게 친애하는 정을 보여 주었읍니다』 이렇게 <라투우쉬>는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이 좋은 조언자도 <샤를르>가 탐험의 계획을 추진시키는 것을 단념시키려 했을 땐 완전히 실패로 돌아갔다.
<라투우쉬>는 무슨 일이 있든지 그것을 중지시키려 그를 「난시」로 불려다가 이 모험은 생명에 해를 입을는지도 모른다는 것을 납득시키려 했다.
<후꼬오>는 그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고집이 무서웠다. 반대로 동요된 것은 <라투우쉬>였다.
그는 무엇인지 새로운 정열이 <샤를르>의 마음을 잡고있다는 것을 이해했다. <샤를르>를 무위(無爲)에 떨어지게 하는 것보다는 위험에 가득찼으나 그걸로 그를 도웁고 격려해주는 편이 좋지않을까 생각했다. <샤를르>는 그 일 외에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