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沙漠(사막)의 불꽃] (17) 나자렏의 길 ①
발행일1962-01-21 [제311호, 4면]
29세의 <샤르르드 후꼬오>는 드디어 운명을 결정하는 한걸음을 내딛었던 것이다. 즉 전례의 문턱을 넘어갔던 것이다. 그 전일에는 어떻게하면 후일에 여기까지 도달할 수 있었을런지 몰랐던 것이다.
그러나 오늘은 무엇 때문에 바로 어제까지도 「생 오규스땡」성당의 주위를 원망과 불확실에 주저하면서 헤메고 있었던가를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가 찾아낸 환희는 너무나 강열했기 때문에 남아있는 모든 것을 압도하고 말았다. 오직 한가지 쓴맛이 남아있었는데 그것은 어째서 이와같이 오래동안 천주를 멀리 떨어져서 살 수 있었는가 하는 것이었다. 단지 하루 사이에 그의 생활은 뒤집혀지고 말았다. 십년동안이나 성사를 보지 않았던 그는 매일 <유브랑> 신부가 드리는 미사에 참례하러갔다. 그는 매주일 고해성사를 보았으며 거의 날마다 성체를 영했다. 대개 자기 스스로 그렇게 하려고 한 것은 아니나 사제가 그를 거기에 이끌었으며 그도 또한 달게 받아 그대로 응했던 것이다.
2천년 이래로 지상에서는 신비의 축제(미사성제)가 살아계신 오주 예수 그리스도의 수많은 행위를 백주의 비밀 속에 계승하고 있다. <후꼬오>는 날마다 자기자신 해방과 신적 생명에 대한 입문을 여기에 구하러 찾아왔다.
그러나 정신적 위안과 같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신앙이 주는 것은 모든 것이 비장하며 숨어있는 것인즉 신앙이 하나의 휴식이라고 진실로 믿는자가 과연 있을 것인가.
물론 습관이 갖고 있는 기괴한 힘이 그리스도 신자들을 끊임없이 반수상태로 밀어넣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은 그들의 신앙의 결과일 뿐만 아니라 신앙의 결핍된 정도를 보여 주는 것이다.
참된 신앙은 타오르는 가시덤불과 같이 타오르는 것이며 모든 성인의 생애는 그것의 열렬한 증거인 것이다.
<후꼬오>는 겨우 회심했을 뿐이었다. 회심은 종교극(劇)의 종국은 아니었다. 그뿐 아니라 전혀 반대였다. 그의 회심은 참으로 그의 전존재의 반역인 것이다.
12년간의 무신앙과 2년반동안의 지상의 여행과 신비적인 여행을 마친 후에 그는 자랑스럽게 「생오규스땡」성당의 문을 들어선 것이다. 그러나 그가 항상 더욱 그리스도에 가까이 가는 길을 발견하기에는 육신과 영혼의 새로운 편력이 3년이상이나 필요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 길을 찾아낸 후에도 역시 그는 끝없이 눈에 보이지 않는 산길을 올라가기에 지치고 피로하지 않을 것이다. 멀리서 바라보고 남이 말을 하기 좋아하는 사람은 그를 우유부단하고 변하기 쉬운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었다.
그러나 어떤 산이든지 일직선으로 혹은 단숨에 뛰어올라갈 수는 없는 것이다. 산길은 사방 팔방으로 구비쳐있다. 그날 그날은 태고적부터 서성대듯이 기묘하게 오고가는 동안에 날이 새었다 어두었다 하였으나 이 산 사나이는 자기가 무엇을 원하고 있는가를 알고 있었으나 항상 절정으로 전진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하여 1886년 10월말에는 이미 <후꼬오>는 전면적으로 정복되고 있었다.
『천주가 존재한다고 믿게되자마자 나는 다만 천주를 위하여 사는 것 밖에 없다고 깨달있다. 즉 나의 수도생활에 대한 성소는 나의 신앙과 동시에 시작된 것이다.』
이 성소가 어떠한 것으로 되는지 그는 아직 조금도 몰랐었다. 그것이 밝혀지기에는 오랜 세월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의 마음은 즉시로 결정되었다. 천주는 모든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그는 천주에게 모든 것을 바치게 될 것이다. 북 아프리카의 심장부에 뛰어들어가듯이 그는 전력을 다해서 신비적인 일대 탐험 속으로 뛰어드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역시 오래동안의 준비와 순명과 대담과 그리고 양식과 열정이 필요했던 것이다.
명령을 내리는 것은 첫째로 사랑인 것이다. 그러나 사랑은 그 계획을 완성시키기 위하여 자 기주위에 자기의 전력을 모으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이다.
회심하던 날 위대하고 신비로운 광채가 <후꼬오>의 영혼을 비쳐주었다.
그러나 그의 빛은 과거를 지워 없애버리는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후꼬오>의 발걸음을 원만하게 할 뿐만 아니라 아직도 그를 지체케 하고 뒷걸음질을 하게 하는 수없는 장애물이 많이 있었다. 너무나 의심하고 있었던 까닭에 단 하루동안에 모든 것을 믿을 수는 없었다.
어떤 때는 복음서의 기적이 믿기 어렵게 생각되었으며 또 어떤 때는 기구문의 구절에 「코오란」의 장구(章句)를 삽입 하려고 했다. 그러나 천주의 은총과 나의 고해신부의 충고가 이 암운을 없애주고 말았다. 나는 수도자가 되어 천주를 위해서만 살고 무슨 일이나 가장 완전한 것을 하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고해신부는 나를 삼년간 기다리게 했다. 나 자신 <보슈에>가 말한 바와 같이 「순수한 무아의 경지에 들어가서 천주 앞에서 소멸하기를」 원하면서도 어떠한 순서를 택해야 좋을지 몰랐었다. 왜냐하면 복음서는 나에게 「제1규는 마음을 다하여 천주를 사랑하는 것이다』라고 가르쳤으며 또 「사랑 속에 모든 것을 넣어두지 않으면 안된다」고 하는 것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신성한 사랑 위선으로 몸시, 더럽혀진 이 말이 <후꼬오>의 마음 속에서 열화와 같이 타올라 이미 그에게 휴식을 허락하지 않았다. 이때 그는 「생 오규스땡」성당에서 <유브랑> 신부가 다음과 같은 말을 하는 것을 들었던 것이다.
『나의 천주는 이와 같이 가장 비천한 자리를 택하였으므로 아무도 천주로부터 그것을 빼앗을 수가 없었다.』
<후꼬오>는 영혼의 가장 깊은 곳까지 흔들리고 말았다. 이 말은 그의 일생의 좌우명이 되었다. 그는 이미 천주를 본받아서 그 시대의 사람들 중에서 가장 비천한 자리를 찾는 것 이외는 아무것도 원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와 가장 가까이 있을 수 있는 것은 그곳뿐이기 때문이다. 한자리에서 그와같은 설교를 들은 다른 사람들은 한동안은 그말의 신묘함에 감동되었으나 그다지 염두에 두지 않고 일상생활의 일자리로 돌아가고 말았다. 그러나 <후꼬오>에 있어서는 이 한 귀절은 그를 세속에서 떠날 수 없이 얽어맨 밧줄을 차차로 끊도록 하는 성신의 칼이 되었다.
천주는 지상자이나 천주의 아들은 인간중에서도 가장 비천한자로서 태어났다. 계시의 양극 사이에는 그리스도교의 가장 위대한 역설이 포함되어 있다. 지상자는 인간이 되기 위하여 그의 영광의 흔적을 전혀 없애도 좋다고 생각할만치 이류를 사랑했으며 사람들의 사랑을 얻기 위해서는 형고와 조소 가운데에서 죽는 것까지도 사양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 이해하기 곤란한 광증 그것을 성인들은 이해했다. 그래서 이 광증이 그들 가운데에서 원망(願望)의 대선풍을 일으키게 했던 것이다.
<샤르르>가 발견한 것도 이것이었다. 이와같은 내심의 드라마가 시작되었을 때 그의 친구들은 그의 마음 속에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지 거의 눈치조차 채지 못했다.
그는 이때도 끊임없이 <모와테시에> 부인의 싸롱에 출입하면서 급사를 쓰고있는 멋진 존재였다. <후꼬오>가 그의 작품의 교정쇄(校正刷)를 고치기도 하고 거기에 지도나 스켓취를 넣는 것 등 일에 몰두하고 있을 동안에 적지않는 시일이 지났다. 책을 출판하는데 필요한 시간은 그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긴 시일이 걸였다. 『모록코 탐험』이 세상에 나온 것은 탐험에서 돌아온 지 사년후인 1888년 2월초순이었다. 이 작품은 지리학자나 사관이나 개척자들, 북아프리카에 열중하고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대성공을 이루었던 것이다. 이 저자는 전보다도 훨씬 이 세상에서 말하는 「가장 빛나는 미래」를 차지할 수도 있었으나 그는 전혀 다른 것을 갈망하고 있었다.
마침 이때 그의 친족의 생활은 매우 동요되고 있었다. 여동생의 가정에는 그를 대부로 선택했던 <샤르르 드 부릭크>라고 하는 사내아이가 탄생하고 나서 그의 종형제인 <엠마누엘 드 풀라뷔니> 조모인 <드 모를레> 부인, 숙부인 <모와테시에> 등의 잇다른 죽음을 당하였던 것이다.
<샤르르>는 자기의 고통과 그의 가장 친근한 사람들의 마음을 갈라내는 듯한 고통만을 괴로워하지는 않았다. 그는 『인생은 하나의 지나가는 길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는 누구나가 다 알고있으면서도 감추고 있는 엄연한 진리와 부디쳐 이것을 가슴 속 깊이 자각했던 것이다. 부활이 확실성에 기인하지 않는 것은 무엇 하나도 불멸한 것은 없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