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 對話(대화) (上)
行動(행동)의 適期成熟(적기성숙)
공의회에 무엇을 바랄 것인가?
理解(이해)와 接觸(접촉)할 必要(필요)있다
발행일1962-01-21 [제311호, 4면]
지난 여름 수년간을 「로오마」에서 거주했고 「그리스도교인과 유태인 전국회의」 및 「그리스도의 제4회 전국평의회」의 종교자유에 관한 고문이며 저명한 「프로테스탄트」 대변인인 <넬손> 박사와 그리스도교 일치국의 상임 「로마」본부원으로 임명된 미국 「파우리스트」회의 <스트란스키> 신부가 주로 일치문제에 관하여 좋은 대담(對談)을 하였다.
다음은 그 대담의 내용이다.
스트란스키=<넬손> 박사, 가톨릭교회가 일종의 전체교회회의를 개최하려고 준비하고 있는 사실에 대한 비가톨릭신자들의 감응(感應)을 말씀해주십시요.
넬손=좋습니다 신부님. 필연적으로 오는 첫째 반응은 놀라움이었고 둘째 반응은 만족감이며, 아마 처음 몇주일은 일치 문제에 관하여 공의회에 관심있는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올라 지나친 낙관주의가 아니었나봅니다. 나 개인은 『바로 지금이 적시(適時)리다』하는 거와 다음은 『무엇이 올 것인가?』였읍니다. 즉 그 말안에 저는 의미심장한 자극을 받았고 제한된 기대를 가졌읍니다. 이러한 반응들은 본질적으로 변함이 없읍니다. 공의회의 사실은, 다시말하자면 교황 요안 23세께서 공의회의 필요성을 느끼나는 사실과 그 사업으로 어떤 건설적인 가능사(可能事)를 찾앗다는 사실은 근본적으로 중대한 사건이 될 것입니다.
「스」=『바로 적시(適時)라』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입니까?
「넬」=근 백년전의 미완결 공의회에서 얻은 비가톨릭 시낮들의 실망은 참으로 심대하였고 또한 오늘날까지 너무 오랜 시일이 경과했읍니다. 제1차 「바티깐」공의회에 대한 저의 인상은 바깥사람으로서 완전히 무지(無知)한 동료 그리스도교인의 하나였읍니다. 만일 무엇이든지 암흑을 밝게 할 수 있다면은 그것이 실현되어야 한다는 것과 특히 정신적 감정적 의미에서 뿐만이 아니라 실제적이며 협동적인 의미에서 그리스도교 일치가 과거 어느때보다도 가장 중요한 바로 이 시기에 처해있다는 것이 또한 중요한 사실이라고 하겠읍니다.
「스」=교황 성하는 지금 언급한 그 암흑을 밝게하려하십니다. 자주 성하께서는 교회 근대화의 필요성을 강조하셨읍니다. 만일 공의회가 비가톨릭신자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몇가지 교리를 명백하게 할 수 있고 또 가톨릭신자들에게 더욱 강렬한 그리스도교적 생활을 고취시킬 수 있으며 교회의 많은 대외적인 훈령(訓令)을 현대화 할 수 있다면은 나는 가톨릭교회의 「이메지」가 우리들 분리된 형제들에게 더욱 명료히 될 줄 믿는바입니다. 결국 이것이 「에큐메니칼」(교회일치)운동 무대에서 교회가 할 수 있는 가장 최선의 과업인 것입니다. 「프로테스탄트」 「올토독스」 혹은 일부 「로마」 가톨릭이 어떤 일반적인 동의(同意)에 도달하는 희망을 가지고 『재일치』공의회를 위한 준비가 되어있지 않다고 봅니다. 우리들의 공의회는 대대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그 준비사업 중의 하나인 「그리스도교 일치국」은 분리된 형제들이 교회를 자신들이 믿어야 하는 교회로 보도록 도와주려는 그와같은 방법으로 공의회의 신학적 사목적 결정을 인도하는데 도움이 되도록 노력하고 있는 것입니다. 더욱이 교회가 인간면에 관한 수많은 불완전을 의식하고 있고 따라서 더욱 많은 자기정화(自己淨化)를 필요로 한다는 것을 의식하고 있다는 사실을 공의회가 보여줄 것이라는 것이 중요합니다.
「넬」=저는 당신의 논평중의 하나를 강조하고 싶고 또 다른 논평에 대한 깊은 만족의 뜻을 표명하고져합니다. 「로마」와는 별도로 「에큐메니칼」이나 재일치 운동을 전개하고 있는 「프로테스탄트」 조차도 (아마 동방 「올토독스」도 마찬가지라고 믿습니다) 「로마」와 일치 문제를 토의할 준비가 되어있지 않다고 확신합니다. 그들을 「프로테스탄트」와 「프로테스탄트」 또는 「올토독스」 등 자신들을 통합시키는데 무엇을 해야하는지 저도 아직 모르고 있읍니다. 그러나 나는 우리들 인간의 불완전과 우리들 분리된 교회의 입장에서도 불구하고 「로마」 가톨릭교회의 겸손된 고백이 「에큐메니칼」 정신의 가장 안전하고 가장 필요한 행위의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당신이 말하듯 교황 성하의 공의회 소집과 책임있는 위치에 있는 다른 인사들의 성명이 거의 교만에 근사한 자기만족과 같이 보였던 낡은 자세를 바꾸게 하리라 믿습니다. 또한 나는 공의회의 소집이 비단 그리스도교 일치를 증진시키는 요인(要因)일 뿐만이 아니라 그것이 일치를 향한 행동적인 발전을 위한 시기가 무르익었다는 것을 증거했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로마」 교회 안이 모든 징조를 생각합니다. 즉 2명의 선 교황이 공의회 소집을 생각하셨고 또 그렇게 되기를 촉구했다는 사실입니다. 또 나는 「세계교회평의회」(WCC)의 창설과 지난 50년간에 걸친 소규모의 여러 동일한 종류의 평의회를 생각합니다. 한편 「올토독스」 교회 내에서는 일치를 향한 새로운 파도가 일고 있읍니다. 이러한 모든 현상은 성신이 많은 그리스도교인 가운데 작용하고 있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이와같은 성신의 활동과 성서(聖書)에서 쇄신된 관심을 가진 그리스도교 일치를 향한 광범위한 운동을 어째서 연결시키지 않는지요?
「스」=특수한 역사적 행적에 있어서 천주의 필적(筆跡)을 더듬는다는 것은 항상 어려운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에큐메니칼」운동에 관한 검사성성(檢邪聖省)의 서한을 읽었을 때 나는 비가톨릭 그리스도교인의 기분과 또한 그리스도교 일치를 증진시키려는 가톨릭의 욕망과 노력에서 성신의 작용을 찾으려는 것이 가톨릭 교회의 지나친 생각이라고는 생각치 않았읍니다.
「넬」=성서개혁(聖書改革)을 고려해야합니다. 여하튼 성서는 모든 우리들 그리스도교인의 『책』이며 천주의 뜻을 연구하고 성서에 계시된 바를 연구함으로써 가톨릭신자들은 비단 그들 자신을 보다 잘 이해할 뿐만 아니라 그들의 분리된 형제들을 이해해야할 것입니다 가톨릭과 비가톨릭의 성서학자들은 각자의 주석적(註釋的)인 연구를 더욱 밀접하게 또한 더욱 객관적으로 접촉하고 있읍니다. 예를들면 『로마서』(書)에 관한 최근의 연구는 <루터>와 <칼빈> 및 <메란크톤>의 개혁, 신학의 많은 부문에 집중함으로서 우리들이 알다싶이 「프로테스탄트」와의 토의를 위한 훌륭한 토대를 이루었다는 것을 입증하는 겁니다. 그리고 발전하고 있는 성서 신학은 동방신학(東方神學)과의 보다 밀접한 재접근(再接近)을 발견하고 있읍니다.
「스」=흥미있는 것은 「그리스도교 일치국」장 <베아> 추기경은 1920년에 한 성서연구회의에서 처음으로 비가톨릭과 중대한 신학적 토의를 했었읍니다.
「넬」=정말 우리들 자신의 안도(安도)와 지도의 구원을 위하여 잘 명심해야 할 일입니다. 그것은 단순히 우리들 신앙의 증거로서 그 자체안에 중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들 자신의 안도와 지도와 구원을 위한 것입니다. 오로지 우리가 단결함으로서 세계는 성부께서 그를 보내셨다는 것을 믿게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