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賃金은 生活費 能力·天才는 不均等
인간은 권리를 가지고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 권리를 적당한 수단으로 행사할 수 있어야 한다. 그 중에서도 생활을 영위하는 권리는 다른 기본권리와 동등히 중요하겠다. 그 수단은 일하는 권리인데 거기 따르는 정당한 보수로서 결혼할 수 있으며 또한 그 가족을 고상하고 안락히 유지해갈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곧 생활수단이요 사회윤리(社會倫理)의 용어를 빌린 생활비(生活費)인 것이다.
이런 근본사상(根本思想)에서 <레오> 13세는 노동조합 및 사회보장법의 원리를 시인(是認)했던 것이다. 노동조합이나 사회보장법은 개인이 도달할 수 없는 곳을 말하자면 개인의 힘으로서는 어찌할 수 없는 것을 보충해주는 수단인 것이다. 이것을 역사적 경험을 통해서 볼 때 노동조합의 기능을 빌리지 않고서는 노동을 조절하고 노임(勞賃)을 조정할 수 없었다. 또 굶는 지겨에 이르러도 아무런 보장이 없기도 했다.
노임이 형편없이 싼 것 비록 비천한 직업이요 숙련(熟練)되지 못한 직공에 대한 보수도 문제된다. 그 때문에 교회는 노임을 항상 생활비와 결부시켜서 생각할 것을 명하고 있는 것이다. 허나 여기서 경계할 것은 사회정의(社會正義)를 위한 투쟁에 있어 그 투쟁의 수단은 건전하고 도덕적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흔히 이런 말을 듣는다. 정의를 위해 싸운 것이니 그를 위한 모든 수단은 다 정당하다고. 결코 그렇지 않다. 『목적은 수단을 정당화 하지 않는다』 경제적인 어떤 타산관계에서 아무런 것을 쓸 수는 없는 것이다.
인간의 기본권리 즉 천주께서 태워주신 권리는 동등한 것이겠지만 보수란 것은 반드시 균등해야 할 것은 없는 것이다. 그런 불균등은 사회적으로 필요하기도 한 것이다. 그 바탕은 개인의 능력 교육에 따른 것이다. 이런 바탕에서 균등원칙을 세울 수는 없다. 물론 진정한 능력에 바탕을 두어야 하겠음은 더 말할 것 없다. 실은 여기 바탕을 장만키도 막연하다. 가령 「헐리우드」 인기 배우의 수입은 대통령의 그것보다 많을수도, 대학교수의 봉급은 어느 수지 맞는 일의 기술자보다 못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 때문에 교회는 경제생활에 있어서 인간의 존엄은 오직 천주께서 창조하신 제 「영혼」을 최종 근원으로 삼고 있는 것이다. 인간의 존엄은 제 본성에 바탕을 둔다. 이는 자기의 부(富) 제능, 교육 혹은 사회적 위치와는 독리보딘 것이다. 모든 이가 동등히 누려야 할 기본적 동드옫 있다. 그러나 개인의 성질과 제능을 완성시킬 불평등도 또한 있는 것이다. 가령 물에빠저 죽을 지경이 된 아이를 보고 그의 가정형편을 생각할 수 없지 않을까.
이런 개념에서 우리는 가톨릭 사회관(社會觀)을 생각할 수 있다. 여기서 강조할 것은 가톨릭 사회관이다. 우리는 맹목적으로 독제나 공산주의를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 또 오용(誤用)되는 민주주의를 경계하는 것은 아니다.
교회가 가르치는 사회교의(社會敎義)는 다만 종교적인 이유만을 가진 것이 아니고 실로 사회의 안정(安定)을 위한 것임을 알아야겠다.
■ 財産을 聖化 社會理論의 根本的 差異는 무엇?
최근 <요안> 23세 성하께서는 대체로 노동자들로 구성된 순례단에 이런 말씀을 주셨다.
▼절대적 평등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정의와 애덕으로써 불쌍한 자들의 상태를 개선하여 주도록 부단히 노력해야 한다.
▼부한 자는 자기 재산을 성화(聖化)하도록 하라. 빈자는 스스로 노력할 것이며 양자는 서로 부조(扶助)할 것이다.
▼참 부(富)는 노동에 있다. 정당한 보수로 부(富)의 올바른 분배의 길이 열려야 한다.
▼이런 물적 재화(物的財貨)를 떠나서 노동의 존귀함을 알고 고통 가운데서 초자연의 부(富)를 얻을 수 있는 것이다.
대충 이렇게 말씀하시고 『우리는 그 모범을 30년간 보통 노동자 같이 일하신 「나자렡」의 예수에게서 찾을 수 있다』
교황께서는 교회의 사회이론(社會理論)을 비평하는 자들이 이 새 회칙 「마뗄 엩 마지스뜨라」를 아무 말성 없이 받아들였다고 했다.
이것은 가장 중요한 문제점에 있어서 전반적인 의견일치(意見一致)를 보였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고 했다. 그러면 무엇이 근본적으로 그네들과 대립(對立)되는 것이겠는가.
이점을 성하께는 분명히 지적했는데, 그것은 『초자연생명』(超自然生命)에의 신앙인 것이다.
이와같이 동시에 분명히 설명하신 것은 교회의 관심(關心)은 오직 영적인 것에 제한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물적인 것이 영적인 것에 연관되어 있는한 교회는 물적 복지(福祉)에 관심을 보내야 하겠음을 명시(明示)하였다.
성하의 짧은 말씀 가운데서 우리는 경제질서(經濟秩序)에 관한 교회적 태도를 알아들을 수 있겠다.